영조 40년 구월 갑신일에 전하(영조)께서 홀로 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어 선세자(사도세자)의 일을 말씀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시 ‘올빼미’를 읊으셨다. 가의대부 도승지 겸 예조참판 신(臣)채제공, 전하의 명을 받들어 손 모아 절하고 삼가 이를 적는다. ‘올빼미야 올빼미야 내 자식을 잡아먹었거든 내 등우린 헐지 마라 알뜰살뜰 길러낸 어린 자식 불쌍하다’
1762년 5월21일 엿새 동안 뒤주에 갇혀 울부짖던 사도세자는 숨을 거뒀다. 1764년 9월12일 영조는 채제공을 불러 사도세자를 애도하는 자신의 시를 감추게 했다. 1800년(정조 24년)1월 19일 48세의 정조는 갑작스런 병으로 승하했다.
집권세력 노론을 타파, 절대왕권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도세자는 노론의 음모에 휩싸여 정신병자로 몰린 뒤 뒤주 속에서 숨을 거둔다. 사도세자가 숨진 이후 사도세자의 충정과 노론의 음모를 간파한 영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시로 담은 금등지사를 남긴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개혁군주 정조는 아비를 살해한 집권세력 노론을 타파하고 탕평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수립하기 위해 선대왕의 유작 금등지사를 찾아낼 것을 규장각 대교 이인몽에게 비밀리에 지시한다. 금등지사를 둘러싼 정조와 노론의 생사를 건 숨 막히는 암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정조는 얼마 안 있어 의문의 병으로 승하한다.
정사로써 입증할 수 없는 취성록, 팩션으로 재탄생
 |
▲ 금등지사를 소재로 한 소설 영원한 제국은 이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으며 최근에는 드라마의 주요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 이 이야기는 실제 정사(正史)로는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1992년 동경의 동양문고에서 우연히 ‘취성록’이라는 고서를 발견한 작가 이인화는 그 내용을 읽고 충격에 휩싸인다. 정조의 독살설, 선대왕의 금등지사, 규장각 대교 이인몽은 과연 실재하는 인물일까. 안타깝게도 취성록의 내용은 정사로는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작가 이인화가 택한 방법은 여기에 창의적 상상력을 보태 팩션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캐캐묵은 먼지 속에 가려진 채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금등지사’는 이렇게 소설 ‘영원한 제국’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됐다.
금등지사는 기실 서경 주서 금등편에 나오는 주공의 관한 이야기이다. 주공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형인 무왕이 죽자 어린 아들 성왕이 천자에 즉위하고 주공이 섭정하게 된다.
그러나 무왕의 다른 세 아우들은 주공을 시기, 주공이 성왕의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음모를 퍼뜨리고 결국 주왕은 스스로 섭정을 사직하고 변방으로 물러난다. 얼마 뒤 성왕은 금자물쇠가 달린 서류함인 ‘금등’을 열어보고 자신이 어렸을 때 병으로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주공이 자기 대신 본인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천지신명께 빌었던 기록을 읽고 크게 뉘우치며 주공을 다시 복직시킨다.
취성록은 주공의 이야기를 그린 금등지사에서 영감을 얻었고 소설 영원한 제국은 취성록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팩션이다. 제목이기도 한 영원한 제국은 절대왕권이었던 중국의 주나라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추측을 낳으며 당시 보수진영에서는 뜨거운 환호를 진보진영에서는 싸늘한 냉대를 불러 오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한 제국은 한국형 팩션의 개벽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베스트셀러이다. 팩션은 팩트와 픽션을 합성어 신조어로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에 작가의 상상력을 결합해 새롭게 재창조한 문화예술 장르를 일컫는다.
영원한 제국, 바람의 화원, 성균관스캔들 등 팩션 인기몰이
영원한 제국은 이후 1995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후 근 15여 년 간 침묵 속에 잠들어 있던 금등지사는 최근 안방극장의 주요 소재로 재등장하면서 거센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금등지사는 현재 KBS2 TV에서 방송 중인 월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기둥 줄거리의 한 축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성균관 스캔들은 소설 ‘성균관 유생의 나날(정은궐, 파란미디어)’을 원작으로 제작된 드라마이다. 원작에서는 금등지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정조 독살설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다룬 ‘금등지사’를 성균관 유생의 나날이라는 로맨스에 더하면서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은 로맨스와 서스펜스를 결합한 창작물로 거듭난 셈이다.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 3원으로 불리는 혜원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그린 베스트셀러 ‘바람의 화원(이정명, 밀리언하우스)’ 역시 팩션이다. 바람의 화원은 이후 동명의 SBS 드라마로도 제작됐으며 영화 ‘미인도’로도 제작됐다.
 |
▲ 성모 마리와아 예수 그리스도를 연인관계로 설정, 전 세계적으로 팩션 돌풍을 몰고 온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 영원한 제국, 바람의 화원, 성균관 유생의 나날 등은 출판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또 다른 장르로 제작됐다.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동이’도 팩션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소설계의 빅뱅이라고 불리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전 세계적으로 팩션 열풍을 몰고 왔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연인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다빈치 코드는 교황청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이후 영화로도 제작돼 기록적인 흥행성적을 거뒀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한 수사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팩션의 원조로 불리며 화제가 된 작품이다. 장미의 이름은 이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작가적 상상력을 불어넣은 팩션은 역사적 실체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유발하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폭 넓은 사랑을 받곤 한다. 반면 팩션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오인하게 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이 여장남자로 등장하면서 신윤복의 후손들은 신윤복이 여자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참신한 소재, 글로벌 아이템 문화산업 첨병
그럼에도 불구하고 팩션이 지속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 가운데 역사적 사실을 대중문화로 창조하면서 자국만의 독특한 정서와 문화를 담은 콘텐츠를 전 세계에 알리는 문화산업의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한 몫 하고 있어 보인다.
현재 상영 중인 중국 영화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2010, 서극 감독)’은 측천무후 시대 실존한 중국의 수사관 적인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적인걸이라는 실존인물에 ‘인체 자연발화’라는 영화적 상상력을 결합한 적인걸은 1억3,000만 위안(한화 224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블록버스터이면서도 자기 민족의 영웅담을 통해 중화주의를 전 세계에 알리는 문화첨병 역할도 한다.
비단 팩션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이면서도 참신한 소재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알리는 문화콘텐츠는 이제 한 국가의 주요 산업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최근 ‘대한민국 신화창조 프로젝트’ 2010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을 진행하고 있다.
 |
▲ 실존 수사관 적인걸과 인체 자연발화라는 창의적 상상력이 결합하면서 중화민족의 영웅은 영화 속 명수사관으로 재탄생했다 |
콘텐츠진흥원 방송영상산업팀 이종석 과장은 “전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소재,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소재를 발굴하는 것이 기본 취지”라면서 “예를 들어 한류를 통해 한국의 문화상품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경의 한 서점 먼지 속에 묻혀 있던 금등지사가 대중을 사로잡는 문화콘텐츠로 거듭났듯이 참신한 아이디어와 창의적 상상력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가 감동하고 깜짝 놀라는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