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민·군 일치단결…안시성 방어로 승리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수(隋)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졌다.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은 매우 약해졌다. 따라서 이연이 세운 당(唐)나라와 잘 지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건국초기였기에 아직 고구려를 정벌할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양국의 불안스러운 화친은 30년 정도 지속됐다.

그러나 당 고조에 이어 왕에 오른 당의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도 영류왕 14년(631)부터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동쪽의 부여성(扶餘城)에서 요동반도 끝에 있는 비사성(卑沙城)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으면서 만든 토성이 장마로 무너지게 됐고, 고구려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무너진 토성을 급습해 점령해 버렸다.

토성마저 뺏긴 당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져 더 이상 공격다운 공격을 행할 의지를 잃어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대치가 길어지면서 요동 지역엔 이내 추위가 밀어닥쳤다. 말에게 먹일 풀조차 없어지고 군량 부족이 심각해지자, 당 태종은 음력 9월 철수를 결정한다.

당군이 요수까지 철수했을 때는 벌써 음력 10월로 군사들은 추위와 허기에 지쳐 수도 없이 죽어 갔다. 간신히 요수를 건너자 이번에는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쳐 많은 병사가 얼어 죽는다.

잠언에 ‘경영(經營)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니 모략(謀略)을 가지고 전쟁하라’고 한 것처럼, 당 태종은 나름대로의 모략을 갖고 전투에 임했던 것 같다.

즉 수나라의 패전을 교훈 삼아 장마에 대해 철저히 대비했고, 안시성을 우회해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 우(愚)를 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이토록 길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요동지역의 혹한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는 물론 양만춘이라는 고구려의 명장이 안시성을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구려 본기는 철군을 일찍 결정하는 덕분에 당나라는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침공 결국 실패

당 태종은 철군하자마자 다시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1년 이상을 지탱할 군량을 준비시켰고,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선박 1100척을 건조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갑자기 죽게 되면서 고구려 공격계획은 중단하게 된다. 당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당 고종은 약 6년 후 17만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육군은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격퇴당했고, 해군마저 육군의 진격이 불가능해지자 퇴각하면서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수나라와의 네 차례에 걸친 전쟁과 뒤이어 당나라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당당하게 승리한 고구려의 모습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한다.

장마와 한파, 물보작전 등 날씨가 고구려의 승리에 도움을 줬으나 결정적인 승리는 바로 고구려인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랑스러운 선조와 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이때 수나라나 당나라가 고구려를 이겨 고구려 땅을 중국으로 편입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기네 땅이었던 역사가 한 번도 없었던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세상이니 당연히 고구려의 땅은 다 중국 땅으로 지도에 그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미명하에 역사를 왜곡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이다.

제공: 국방일보 |

글: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저작권자 2011.07.12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