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를 앞 둔 금요일, TV 앞에서 빈둥거리며 리모컨의 온갖 버튼을 눌러대다가 다시보기에서 한성별곡-정을 보게 되었다.
1,2회를 무료로 보여주고 3회부터는 돈을 내란다. 제길슨!!
이미 재미를 느껴버린지라 계속 보고 싶은 마음에 드라마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봤더니 매우 작은 화면으로 다시보기를 제공하고 있었으나, 화질은 물론 음질도 참 거시기 하여 배우들의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다. 당연 배우들 표정도 안보인다. 화면이 어둡고 작은지라.....
보고 싶기는 하나 돈 주고 보고 싶지는 않고....이런...이런....
결국 그 찌질한 다시보기를, 비주얼을 통한 디테일을 포기하고 제공된 대본과 대조하면서 보았다. 이런 정성으로 공부했다면.....주류사회로 편입되었을까?!
허나 아무리 재미있다한들 열악한 화면과 소리에 눈과 귀를 기울이다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결국 7회는 대본만으로 패스.
어렵게 8화까지 보고 나니 여러 가지로 비장한 마음이 스며든다.
드라마는 재미있었다.
짧아서 빠른 템포로 이야기가 전개되니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긴장감이 더 돌긴 하지만, 그만큼 드라마에 대한 설명이 줄어드니 스토리를 따라가려면 머리를 좀 굴려야 하는 귀찮음이 없지 않았다.
한성별곡에 관한 지난 인터넷 기사를 보니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 커피프린스가 방영되었었나 보다. 그땐 늘상 공유와 윤은혜의 사랑 이야기 범벅이었더랬지..
그때 이 드라마를 알았다면 큰 화면으로 보았을 터인데...
한성별곡 정에서 '정'자가 바를 정자임을 포스터를 내려받으면서 알았다. 정이 초코파이의 그 정이 아니라 바를 정자였다.
正...되내이게 된다. 바름이란... 최선이란 없고 그저 차선만 있다는 정조의 대사가 머릿속을 왔다갔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차선은 커녕 차악..이런 것만 보이는 것 같다.
정조는 후대에 이야기 거리를 많이 남긴 왕 중의 한 명일 것이다. 평생 암살위협에 시달렸던 그의 죽음에 대해선 말이 많다. 그러나 정조에 대한 역사서들을 보면 독살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독살이 아닐 수도 있겠다. 정조는 죽음의 위협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밤새 책을 봤던 극도로 신경이 곤두서는 삶을 살았다. 거기다 워커홀릭이었다고 하니 이래 저래 명을 재촉했을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왕도 정조였지..여기 저기 잘 나오시는군 정조 임금님...
우리는 정조를 개혁군주로 알고 있다. 드라마에서 박인빈이 서얼인 박상규에게 아비를 왜 아버지라 부르지 않느냐 타박하는 장면이 등장할 수 있는 것도 정조 시대니까 가능한 장면이 아닐까? 하지만 정조가 무슨 개혁군주냐고 하는 견해들도 있다.
내가 역사학자도 아니고 정조에 대해서 파고드는 사람도 아니니 그가 개혁군주였는지 아니였는지에 대해선 결론 내릴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개혁군주였던가 아닌가는 내 삶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에게 매력을 느꼈고 정조가 화성 천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자신의 꿈을 펼쳤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해 보기도 했었더랬다.
하지만 얕은 역사 지식, 현실 인식, 나름의 삶의 경험들은 정조가 더 살았더래도 이 나라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게 한다.
정조와 나영의 소망, 나영의 소망을 나눠가진 박상규, 양행수, 여기서 소망이란 지금 말로 하면 희망이고 꿈일터...꿈, 너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이여...이 말은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지워지지 않는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 말이 선명하게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희망이란 말에선 기망이란 말이 떠오를 뿐.....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비가 어린 순종을 앞세워 대신들의 인사를 받는 장면에서 한 대신이 정조가 수은 중독으로 승하했다는 소문이 있다며 도대체 누가 그랬냐며 우상대감에게 말하자, 우상대감은 알아 무엇할 거냐며, 시간이 지나면 모두에게 잊혀지고 역사속으로 묻혀버릴 것이고 그것이 끝이다 라고 말한다.
어차피 우리가 정치인들의 작태에 분노하더라도 그때뿐이고 돈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런 저런 꼼수를 부리며 세월을 흘려 보내는 동안 '천한' 서민들은 퍽퍽한 삶에 지쳐 어찌 해보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간다.
박인빈이 박상규에게 나도 아버지한테 권력만을 탐한다고 했었다며, 과거에 처음 급제할 때는 좋은 정치를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고 가장이 되니 아버지와 같아지더라는 말은 젊은 세대가 그들이 비난했던 기성 세대가 되어 갈 수 밖에 없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향이 처럼 자기 아이에 대해서 혹은 살아 있는 나영이나 박상규 같은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 보면 변화에 대한 체념이 다가온다. 세상엔 악순환의 작은 고리들이 너무 많다. 쉽게 끊어져 나갈 고리들이 아니다. 박상규가 임금님도 바꾸지 못하는 세상을 내가 어떻게 바꾸겠냐는 대사가 서글프지만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난 비관론자일까.
이재한이 채승환을 베면서 천한 백성을 위해 왜 양반이 희생해야 하냐고 외친다. 그건 지금 말끝마다 서민을 위해, 국민과 나라를 위해를 말하는 정치인들의 마음과 통하지 않을까 싶다.
노비가 되어 경험한 세상은 양갓집 규수가 사는 세상이 아니더이다. 타고나지 못해 가지지 못한 자들의 그 고통, 그 괴로움...이 대사가 참 가슴에 박혔다.
과거처럼 양반, 상민, 천민의 구분이 없다하지만 우린 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신분이란 것이 없지 않음을.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양극화가 타고나지 못해 가지지 못한 자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더 크게 키우고 있다는 것도...
가지지 못했다는 현실로 꿈과 신념이 조롱당하는 시절이다. 그래서 마셔도 취하지 못하고 미친년처럼 달구경가야 할 사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소망.. 내 나라 조선입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고통, 괴로움을 끌어안고 살면서 미친 듯이 달구경을 가야 할 지라도 나라가 없다면 더 불안하고 서러울 것이다. 그래서 나영의 저 대사를 부정할 수 없다. 양행수가 조선이 아닌 어떤 곳이든 떠나겠다는 결심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기 때문임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박인빈이 건낸 노비문서와 금덩이를 쥐고 좋아하던 상규 모, 다른 사람의 노비문서도 없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규의 말에 상규 모는 그런게 무슨 상관이야 너랑 나랑만 잘 살면 되는 거야 라고 말한다. 마지막 소망이 내 나라 조선이라는 말에 동의하지만 상규 모의 말이 내가 사는 방법인 것을 .....
괜찮은 드라마가 아닌가 한성별곡 정
'일상잡기 > 일상잡기 -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듀 해를 품은 달 (0) | 2012.03.17 |
---|---|
드라마 해를 품은 달 (0) | 2012.01.29 |
해를 품은 달 (0) | 2012.01.21 |
멀린 시즌 4 (0) | 2011.12.31 |
공주의 남자와 역사스페셜 (1) | 2011.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