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파헤친 음모론

음모론 속 과학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1.03.17 ⓒ ScienceTimes


1989년 7월 일본 도쿄 시민들이 즐겨 찾는 나들이 명소인 신주쿠 도야마 공원 부근의 한 공사현장에서 괴이한 유골들이 쏟아져 나왔다. 약 100여 기로 추정되는 이 유골들은 두개골이 드릴로 구멍이 뚫려 있거나 팔다리를 톱으로 잘라낸 흔적이 있는 등 한결같이 참혹한 형태였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국립예방위생연구소(현 국립감염증연구소)를 짓기 위한 공사 현장으로서, 예전에 육군군의학교 방역연구소가 있었던 장소였다. 육군군의학교 방역연구소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731부대의 상급 기관이다. 따라서 그 끔찍한 유골들의 정체에 대해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희생자들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터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사체를 의대 실습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 왔을 가능성이 높다며 731부대의 관련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시민단체의 감정 결과 그 유골들은 일본인이 아닌 다국적의 몽골로이드계 아시아인으로서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결국 일본 정부는 현장에 대한 추가 발굴 조사를 약속했고, 최근 그 옆에 위치한 공무원주택의 철거가 시작되면서 조사에 착수했다. 현재 전체 발굴 면적 3천㎡에 대한 유골 발굴 작업이 이달 말 완료 예정으로 진행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포로 및 점령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생체실험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731부대의 창설자는 이시이 시로(石井四郎)이다. 일본 육군군의학교 병리학교수 출신인 이시이 육군 중장은 “서구 열강들이 모두 비밀리에 세균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자원이 부족한 일본도 세균 무기의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1933년 만주 하얼빈 부근에 이시이 방역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이 연구소는 1936년 조직의 은폐를 위해 ‘전염병을 옮기지 않는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부대’라는 뜻의 ‘방역급수부대’로 편입된 후,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8월에는 ‘만주 731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전체 병력 약 3천명에 군의관만도 200여 명에 달한 731부대에서의 생체실험은 특설감옥이 있는 특수동에서 이루어졌다. 특수동의 각층마다에는 3평 남짓의 방 20개가 있었는데 방마다 10명씩의 마루타들이 수용됐다.


마루타에게 행해진 끔찍한 생체실험

마루타(丸太)란 ‘껍질만 벗긴 통나무’란 뜻의 일본어로서, 바로 생체실험 대상자들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이곳에서 살아 있는 마루타들에게 행해진 생체실험은 정말 잔인하고도 끔찍했다. 먼저 이시이의 주장대로 값싼 세균 무기의 개발을 위해 마루타들을 대상으로 한 세균 실험이 이루어졌다.


페스트균, 콜레라균, 결핵균, 탄저균 등을 마루타에 주입해 죽어가는 반응을 비교 관찰하는가 하면 임산부와 태아를 똑같이 실험하기도 했다. 또 페스트균과 탄저균 등을 피부, 음식물, 호흡기관 등 각각 다른 감염경로로 나눠 인체에 침투시킨 뒤 세균의 농도 및 감염경로에 따라 인체가 변화하면서 죽어가는 과정을 상세히 관찰하기도 했다.


나중에 발견된 극비 자료에 의하면 3살짜리 아이도 이런 세균 실험에 마루타로 동원되었음이 밝혀졌다. 세균을 감염시킨 환자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막사에 넣고 전염병이 얼마나 빨리 확산되는지 알아보는 실험은 다반사로 행해졌다.


731부대가 특히 관심을 가진 생체실험 중의 하나는 동상에 관한 연구였다. 1939년 1월경 일본 관동군이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에서 군사작전을 하던 중 무려 2천여 명이 동상에 걸린 난처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상이 걸리는 상황을 알기 위해 731부대는 마루타들을 영하 25도 이하 초속 5m의 강풍이 부는 들판으로 데려가 들것 위에 반듯이 눕혀 꼼짝 못하게 묶은 후 시간 변화에 따른 신체 변화를 알아보는 실험을 실시했다.


마루타들은 맨발인 경우, 젖은 신발이나 젖은 장갑을 낀 경우, 술을 마신 경우, 공복인 경우 등 각기 다른 조건으로 실험에 동원됐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루타들의 손발이 얼어서 하얗게 변하고 부어올라 무감각해졌다가 나중에는 톡톡 소리를 내며 손발이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밖에도 각종 기상천외한 생체실험들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인체의 70%가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루타를 한증막에 넣고 수분을 빼는 실험도 강행됐다. 이때 저울 눈금으로 확인된 마루타의 체중은 정말 처음 체중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정맥에 공기를 주입시키거나 거꾸로 매달아 몇 시간 만에 죽는가 알아보는 실험이 행해졌는가 하면, 고속원심분리기에 마루타를 넣어서 생피를 짜고, 혈관에 말의 피를 주입시키기도 했다. 물을 전혀 안 주고 빵만 먹이거나, 아무것도 안 주고 물만 먹여서 굶겨죽이는 실험도 자행됐다. 심지어 엄마와 어린 딸을 함께 독가스실에 넣은 뒤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세균전으로 무차별 대민 학살

731부대는 이런 과정을 거쳐 개발한 세균무기를 전투와 대민 집단학살에 실제로 사용했다. 러시아 측의 자료에 의하면 731부대가 세균무기를 실전에 처음 사용한 것은 1939년 몽골 노몬한에서 벌어진 소련-몽골 연합군 간의 전투 때였다.


소련-몽골 연합군에 패배한 뒤 후퇴하던 일본군은 731부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731부대는 일본군이 퇴각한 할힌골 강에 세균무기를 살포해 적의 추격을 막았다. 731부대가 대량 생산한 세균은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페스트, 천연두, 콜레라, 파상풍, 폐렴, 성병, 폐결핵 등 거의 모든 질병을 망라하고 있었다.


민간에 대한 세균전은 중국 창춘과 난징, 닝보 등의 도시에서 행해졌다. 창춘에서는 콜레라균을 주민 모르게 접종시켰고, 닝보에서는 콜레라와 페스트균을 하늘에서 살포했다. 또 우물이나 저수지, 강, 호수 등에 세균을 무차별 살포하기도 했다.


굶주린 중국군 포로에게 세균이 든 음식을 먹게 한 후 곧바로 석방시켜 전염병을 퍼뜨리는 수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여 티푸스균에 감염된 과자를 살포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세균전으로 인해 페스트균의 집중 공격을 받은 닝보 시의 중심지는 1960년대까지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기도 했다. 역사상 한 번도 페스트를 경험한 적이 없던 중국 저장성 취저우에서는 일본군의 세균 공격으로 5만명이 사망했으며, 6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건강한 사람 중에서 발진티푸스 환자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731부대가 저장성 일대에서 세균무기를 살포할 때는 벼룩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벼룩들은 저장성에서 볼 수 없는 종으로 밝혀져 세균전의 증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 측은 극동 지역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열었다. 일본 도쿄에서 행해져 도쿄전범재판으로도 알려진 이 재판은 1946년부터 약 2년 6개월 동안 800여 차례가 열렸다. 하지만 약 3천여 명의 마루타를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키고 무차별한 세균전으로 중국인 27만명을 죽인 것으로 알려진 731부대원들이 처벌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측은 731부대가 저지른 악랄한 만행에 대해 전혀 죄를 묻지 않고 눈감아 주었던 것일까?


731부대는 일본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 극비시설이었다. 부대 주위에는 토성과 철조망이 둘러처져 있었으며, 외부인의 경우 관동군 총사령관이 서명한 특별 통행증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이 부대가 위치한 만주 하얼빈 남쪽 반경 6㎞의 영공은 특별군사지역으로 선포돼 어떤 항공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설사 일본군 전투기가 들어와도 격추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을 정도였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만주를 침공하며 참전하자 일본은 731부대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수감된 채 생체실험을 기다리고 있던 150여 명의 마루타를 모두 살해했다. 731부대의 모든 시설은 파괴됐고 자료는 소각되었다.


일본 천황이 항복을 발표한 다음날인 8월 16일 이시이 중장은 만주를 떠나 한반도로 남하해 화물선 여러 척에 방대한 세균전 자료와 부대원을 싣고 부산을 떠나 일본에 도착했다.


귀국 후 이시이는 전 부대원에게 상호 간 교류하지 말고 731부대의 존재를 입 밖에 일절 내지 말라는 철저한 보안수칙을 하달했다. 그리고는 부대 해산을 명한 후, 자료들은 이미 정해진 보관 장소로 극비리에 옮겼다.


731부대의 이 같은 철저한 보안 조치와 신속한 철수 및 증거 인멸 때문에 미국은 죄를 전혀 물을 수 없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의 전후 처리 사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죽음의 공장으로 불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만 약 400만명을 학살한 독일도 쌍둥이와 난쟁이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단행했다. 쌍둥이 어린이들의 눈에 메틸렌 블루를 주사해 눈의 색깔을 푸른색으로 바꾸는 홍채실험을 했는가 하면, 포로의 생식 능력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젊은 남자들에게는 X선 거세실험, 젊은 여자들에게는 나팔관에 이상한 약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다.


이 같은 생체실험에 참가한 나치 의사들이 꽤 많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감옥에 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더구나 포로들에게 악명을 떨친 멩겔레나 슈만 같은 의사들은 외국으로 건너가 신분을 감춘 채 버젓이 의사로 활동했다.


독일 과학자를 영입하기 위해 경쟁


나머지는 대부분 도망치거나 이름을 감춘 채 은둔생활을 했다. 그 중에는 적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으로 건너가 활약한 의사들도 많았다. 그들은 적국에서도 신분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미국과 소련이 모셔갔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독일의 과학자들을 서로 먼저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미국은 ‘페이퍼 클립(Paper Clip)’이라는 비밀계획까지 세워 약 760여 명의 독일 과학자들을 유치했다. 이들에 대해서는 나치에 협력했던 경력이 말끔히 지워졌고, 미국 시민권도 주어졌다.


미국과 소련이 이처럼 독일의 과학자들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독일이 보유했던 앞선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독일의 로켓 과학자였던 폰 브라운의 경우 미국으로 건너가 아폴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한 이들에게 미국이 관용을 베푼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731부대가 보유한 자료는 동물을 이용한 실험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직접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고급 정보였다. 또 세균살포 모델 및 실제 사용 실험을 거친 세균무기라는 확실한 발명품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미국과 소련은 극도의 신경전을 벌였다. 소련은 만주를 점령하면서 미국보다 먼저 731부대의 생체실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731부대가 철수하며 주요 자료를 모두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일본 본토로 가져가 버린 뒤였다.


소련은 생체실험의 핵심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도쿄전범재판이 진행 중이던 1947년 이시이 등의 731부대 간부에 대한 신문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침묵했으며, 그 후로도 소련은 수차례 731부대원에 대한 기소를 요구했다.


아무런 성과 없이 도쿄전범재판이 끝나자 소련은 731부대의 죄상을 고발하기 위해 1949년 12월 25일부터 6일간 하바로프스크 전범재판을 열었다. 이 재판에 기소된 이는 야마다 오토조 관동군 총사령관 및 관동군 군의부장, 수의부장을 비롯해 731부대 소속 군의관, 위생병 등 소련에 체포된 일본군 12명이었다.


당시 소련 재판부는 일본이 조직적으로 세균무기를 사용해 인류를 파멸시키려고 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야마다 관동군 총사령관 및 군의부장, 수의부장 등에게는 강제노동 25년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전범들에게도 최소 2년~25년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일본의 반인륜적 범죄를 처음으로 단죄한 하바로프스크 재판은 서방 진영의 무관심 속에 그 실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재판이 끝난 다음해 소련은 다시 미국 국무장관에게 731부대의 범죄를 다루기 위해 새로운 국제군사재판을 열자고 제의했으나 미국은 그 제의마저 묵살했다.



생체실험에 대한 정보 요구 정황 드러나


그 후 731부대에 대한 더 이상의 단죄는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미국이 그때 왜 침묵했는지에 대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종전 이후 731부대에 대해 총 4차례에 걸친 조사를 한 뒤 4건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 정보장교였던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에서 인공혈액을 연구한 나이토 등을 심문해 1945년 9월 제1차 샌더스 보고서를 남겼다.


2차 조사관으로 임명된 의학자 톰슨은 이시이 시로와 두 번째 731부대장이었던 기타노 마사지를 심문해 1946년 3월 제2차 톰슨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후 로버트 펠에 의해 1947년 4월에 작성된 제3차 펠 보고서에서 미국은 처음으로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보를 접했다. 1947년 12월 제4차 힐 보고서를 작성할 때는 주요 731부대원으로부터 생체실험 표본 및 자료를 완벽히 확보했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미국은 제1차 샌더스 보고서 작성시부터 731부대원에게 면책을 확약하며 생체실험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범재판의 최고 책임자였던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도 731부대원의 죄과를 면책해줄 것을 워싱턴에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일본의 한 요리점에서 미국 정보부 요원과 731부대원 간의 합의가 이루어진 정황도 드러났다.


미국이 정보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731부대원에게 금전을 제공한 사실도 밝혀졌다. 일본의 한 대학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2005년 발견한 2건의 기밀 해제 문서에 의하면, 당시 미군은 731부대원에게 생체실험 자료를 넘겨받는 대신 전범재판의 기소를 면제해주고 총 15만~20만엔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 일본에서 발견된 이시이의 미공개 노트에도 이시이와 연합군사령부 간부들이 회식을 한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일본의 NHK 방송국은 미국 유타주에 위치한 육군 더그웨이 실험장의 문서관에서 731부대가 작성한 생체실험 자료를 찾아내 공개하기도 했다. 약 2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자료에는 생체실험을 한 과정이 약 8천장에 이르는 현미경 사진 및 인체 해부도, 각종 도표 등과 함께 구체적으로 나열돼 있었다.


731부대에 의해 생체실험을 당한 피해자 중에는 미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잡혀 먹덴수용소에 갇혀 있던 미군 포로 중 상당수가 출장 온 731부대 군의관들에 의해 생체실험을 당한 정황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들 중에는 생체실험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그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미국의 공식 입장 역시 731부대의 생체실험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미국은 자국 군인들의 피해 사실을 외면하면서까지 왜 그리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에 집착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그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수의 미군이 참전했던 한국전쟁에서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38선 일대에서는 미국 군의관들조차 알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돌았다. 휴전이 체결될 때까지 이 병에 감염된 병사들은 무려 2천600여 명이었으며, 5%의 높은 사망률을 나타냈다.


1951년 5월 미 국방성은 이 병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731부대가 이미 1942년에 이 병에 대해 연구성과를 거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서방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그 병의 정체는 바로 ‘유행성출혈열’이었다.


미국은 전 731부대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731부대장을 역임했던 이시이 시로와 기타노 마사지가 한국을 방문했다. 특히 기타노는 유행성출혈열 전문가였는데, 이로 인해 미군과 731부대원들의 협력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한국전쟁은 731부대원 출신들에겐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부상자들이 늘어났고 혈액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기타노와 인공혈액 전문가인 나이토는 일본에서 싼 값에 사들인 혈액을 미군에게 비싸게 팔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 자금으로 기타노와 나이토는 일본 녹십자를 설립해 명성과 지위를 되찾았다. 그들 외에 다른 731부대원들도 일본의 의학계 및 교육계의 요직에 진출하여 아무런 걸림돌 없이 활발히 활동했다.


미국의 비윤리적 생체실험


일부 회의론자들의 경우 미국 정부가 생체실험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졌을 이유가 없다며 731부대원들과의 결탁설을 부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렵 미국은 생체실험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직접 비윤리적인 생체실험을 자행하기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2010년 10월 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알바로 코롬 과테말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1940년대 과테말라에서 미국이 행한 생체실험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미국 공중보건국은 과테말라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 및 정신병원 수용 환자 1천600여 명을 대상으로 매독균과 임질균에 감염시키는 생체실험을 단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미 공중보건국은 그 실험에서 일부 죄수들을 성병에 감염된 매춘부와 접촉시킨 다음 페니실린이 성관계에 의한 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도 했으나 유용한 정보를 얻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과테말라 생체실험에 관한 사실은 오랫동안 비밀로 감춰져 있다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웨슬리대 연구진이 터스키기 실험에 대한 자료조사 중 우연히 드러났다. 터스키기 실험 역시 1932년부터 1972년까지 40년 동안 미국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에서 흑인들에게 매독균을 감염시킨 악명 높은 생체실험이었다.


최근 AP통신의 보도에 의하면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당국의 지원 아래 교도소 재소자나 정신질환자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벌인 사례가 40건 이상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생체실험의 유형은 주로 독감, 간염, 임질 등 실제 의료현장에서 빈발하던 질병들이었는데, 생체실험 대상자들이 실험에 강제로 동원됐거나 사전에 실험 내용과 이유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는지의 여부가 밝혀지지 않아 비윤리적 실험이었다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설사 수감자나 정신질환자가 인체실험에 자원했다고 해도 그들이 스스로 법적 능력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 동의했다면 옳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생명의료윤리에서 강조하는 ‘Informed Consent(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라는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Informed Consent’란 의료 담당자가 환자를 치료하기에 앞서 치료방법 및 위험성, 치료비용 등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여 동의를 얻은 후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그런데 ‘Informed Consent’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공교롭게도 ‘뉘른베르크 강령’에서였다.


뉘른베르크 강령이 탄생한 배경



사상 최초로 국제적으로 채택된 의학연구윤리강령인 뉘른베르크 강령이 탄생한 배경은 2차 세계대전 후 나치의 인체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을 재판하고 기소하기 위해서였다.


1946년 12월부터 나치 의사들과 과학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개최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법부는 그들이 행한 인체실험의 적법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역사적 고찰을 통해 의학적, 윤리적 기준 10개 조항을 판결문과 함께 발표했다.


나치 전범들의 단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유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그 10개 조항이 바로 ‘뉘른베르크 강령’이다. 이후 세계의사회 윤리위원회는 뉘른베르크 강령의 정신을 수정 발전시켜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제18차 총회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와 관련해 오늘날까지 의료인에게 지침이 되고 있는 ‘헬싱키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때 행해진 독일과 일본의 만행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독일 나치가 유태인을 비참하게 학살한 것은 유태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과 당시 살인적인 인플레 속에서 유럽 경제권을 장악한 유태인들에 대한 불만을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한 결과였다. 나치 의사들의 생체실험 또한 그로 인한 인종 청소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 731부대가 마루타들을 생체실험용으로 희생시키고 세균무기 실험용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을 살상한 데에는 그 어떤 역사적 배경이나 정치적인 동기가 없었다. 순수한 실험 및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단순한 목적이 이유라면 이유인데, 그래서 731부대가 저지른 만행이 더욱 끔찍하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인들은 진정으로 과거사를 반성하며 유태인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일본은 진정한 반성이나 사과는커녕 아직까지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1989년 신주쿠 도야마 공원 부근의 공사 현장에서 731부대의 마루타로 추정되는 100여 기의 유골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도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들의 사체가 의료 실습용으로 사용된 것 같다고 일본 정부가 논평을 내놓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공무원주택의 철거 이후 현재 그 옆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추가 발굴조사의 완료 이후 일본 정부는 그 유골들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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