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감옥에 다녀왔습니다. 여순감옥은 중국 동북3성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필수 코스처럼 들리는 곳인 것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 수감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여순감옥은 러시아가 지었고, 일본이 여순을 점령하고 나서 지금 형태로 확장한 것이라 합니다.

 

중국의 국가중점역사문화재인 이곳은 1971년 복원되어 대중에게 개방되었다고 합니다. '감옥'이라는 두 글자가 눈부신 햇살 아래서도 음산한 기운을 발산하는 것만 같습니다.

 

 

철창문이 열리고 들어선 입구의 모습입니다. 날씨도 '춘春'삼월이 아니라 '동冬'삼월에 가까운데 여순감옥의 입구는 마음까지 휑하게 만드는 기운이 넘쳤습니다. 수감이 결정된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날때 느끼는 마음의 냉기를 감히 짐작할 것 같다는 말은 할 수가 없네요.  

 

 

입구를 지나니 금속판에 그려둔 여순감옥의 관람 노선도가 보입니다.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해 몇 걸음 안가서 채소 저장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채소 저장소라기 보다 노천 독방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순감옥의 현재의 정확한 명칭은 여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인가 봅니다.

 

 

 

이곳의 담장은 그렇게 높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사람키를 훌쩍 넘긴 했지만 물리적으로는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물관이 아니라 감옥이었을 때 수감자들이 느끼는 담장의 심리적 높이는 어마무시했겠지요.

 

 

감옥 건물에 들어섰을 때와 나올 때 이 옷가지들을 만났습니다. 검신실의 저 옷가지들, 저것들을 걸치게 된 사람들의 통탄의 시간들을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이 들더군요.

 

감옥의 전경이 모형으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형이 자리하고 있는 방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곳이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창문너머 들여다 본 그곳엔 책상과 침상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선명히 느낄 수 있지만 햇살의 온기는 깃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땅의 독립을 위해 목숨바친 안중근 의사와 같은 분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느끼실까요? 그분들의 마음에 저 감옥과 같은 서늘한 기운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물 구석진 곳에 깃드는 햇빛이 반갑고 따뜻하기 보다는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한 순간도 잊지 못하게 하는 것만 같습니다.

 

간수가 사용했던 채찍과 밧줄, 그리고 착고 등 당시에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이 오히려 무감각한 행위처럼 느껴져 스쳐지나듯 보며 기록만 남겨왔습니다.

 

 

고문실의 설명이 섬찟합니다. 수감자들의 피부가 벚겨지고 살이 터지도록 때렸다.

 

고문실을 지나자마자 만난 복도입니다. 고문실을 나온 수감자들의 시선이 이렇게 흐릿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복도에 스며든 햇빛이 그들에겐 어떤 의미였을까요? 

 

 

을씨년스런 기운이 몸과 마음을 파고드는 여순 감옥의 복도입니다.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모습은 박물관으로 단장하면서 많이 정돈된 모습이겠지요. 

 

 

안내인이 앞 뒤에서 이동하라고 재촉하는 모양새가 '감옥체험'을 시키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싸우자고 덤비는 것 같은 어조로 이동해라, 철망 위에 올라가지 마라, 앞 사람과 간격이 벌어지게 말라 등등.... 여순감옥박물관이 감옥이었을 때 간수들과 감히 비교가 안되겠지만 자꾸 안내인이 간수처럼 느껴졌습니다.

 

 

여순감옥엔 안중근 의사 외에도, 이회영 선생, 신채호 선생도 수감되었습니다. 여순감옥에 수감된 분들이 위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걸려 있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달게 받으리

온갖 고난을 겪어 의지가 견고하네

오직 인민은 해방을 강렬히 원하니

갇힌 몸에도 불굴의 마음은 바꾸지 않으리

 

다른 건물로 이동하기 위해 여태컷 있었던 건물을 나서는데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감기더군요. 그 눈부심은 영화에서 감옥에서 나가는 인물의 시선에서 보는 햇살의 그것 그대로였습니다.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국적에 상관없이 이 여순감옥을 나서며 그 찬란한 햇빛을 만난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해 봤습니다만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창밖으로 시선이 절로 갔습니다.

 

위의 사진 속 창살 너머 보이는 방은 환자가 수감되는 곳입니다. 환자를 모아둔다는 의미 외에는 없었을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오히려 병이 악화될 것만 같이 보였습니다.

 

 

 

 

병을 키울 것 같은 의무실 건물을 나와 처형장 건물로 갔습니다.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아래 나무통이 있습니다. 저 나무통이 어떤 역할일지 굳이 설명을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습니다. 천장의 저 도르래는 누군가의 숨통을 조였던 것이었겠죠.

 

 

이 처형장에서 목숨을 빼앗긴 누군가의 유해가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처형장 안에 이런 방들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대기실이었을까요? 어떻게 처형이 이루어지는 등에 대해서 설명이 있었지만 글씨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눈으로 보이는 건물 모습만 훑었습니다.

 

여순감옥에서 안내인한테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을 내야합니다. 처음 입장할 때 200위안을 내고 설명을 듣겠냐고 물어보더군요,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독립열사들의 흉상이 있는 방은 열어 주질 않더군요. 해외에서 중국에 비자값을 내고 비행기를 타고 와서 또 한참 차를 타고 달려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안내인들의 행위는 엄청난 횡포였습니다. 말을 꺼내봤자 죽자고 달라들 것만 같아 흉상들이 있는 건물 내를 창문을 통해 살짝 넘어다 보고 왔습니다.

 

감방들이 늘어서 있는 건물 안에는 암실 독방이 있었습니다. 빛이 들어가지 않는 그곳에 갇히면 얼마나 불안하고 괴로웠을까요? 여순감옥을 돌아보며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를 떠올렸습니다. 먹먹해 집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포스코와 관련해서 아버지가 어떻게 세운 회사인데라는 말을 했다지요.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