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콩은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씨앗으로, 매년 인류가 마시는 커피는 4000억 잔 이상이다. 커피콩은 옥수수나 쌀, 콩과 같은 식량곡물보다 가치 있게 거래되는 것은 물론 세계시장에서 석유 다음의 가치를 지닌다.
커피의 사회적 영향력은 커피가 처음 발견된 약 2000년 전 에티오피아에서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된 커피는 아랍세계를 거쳐 유럽과 그 아시아 식민지들로 전파되고, 또 아메리카로 퍼져가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혔다.
커피는 예멘의 항구도시 모카에서 이슬람 세계로 처음 추출되었다. 그곳은 에티오피아에서 온 식물들이 재배되고 거래되는 장소였다. 기원후 6세기 이슬람 수피승들은 예멘의 커피를 받아들여 밤 세워 기도할 때 졸지 않기 위해 마셨다. 이슬람 성지를 찾아온 순례자들이 이슬람 세계 전체로 커피를 전파시켰고, 15세기 말에는 커피가 가치 있는 무역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아랍의 커피는 다른 사상이나 정치체계와도 관계하기 시작했다. 1511년, 메카(Mecca)의 통치자 카일 베그(Khair-Beg)는 도시 내의 커피하우스에 대해 폐쇄 명령을 내렸다. 자신을 풍자하는 시가 그곳에서 많이 지어진다는 이유였다. 커피애호가였던 카이로의 술탄이 이러한 금지조치를 곧 해제했지만, 커피가 널리 전파되자 지배자들은 이 음료가 민중반란의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커피애호가들에게 가장 악명 높은 박해자는 오스만제국 콘스탄티노플의 대귀족 쿠프릴리로, 그는 거역하는 자들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보스포러스 해협에 던져 버렸다.
16세기에 처음 유럽에 등장한 이후, 커피는 건강에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는 음료로 처방되기도 했지만 사악한 것으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1674년에 익명으로 나돌았던 커피 비난문 <커피를 반대하는 여성들의 탄원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남성들은 앞이 불룩한 바지를 입을 수 없게 됩니다. 그만큼 남성들의 정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축축하고 추잡한 코 외에는 모두 말라비틀어지게 될 것입니다. 딱딱한 것이라고는 관절밖에 남지 않습니다. 발기하여 서 있는 것이라고는 귀 외에 없을 것입니다.”
이 탄원서의 표현처럼 커피를 볶아 마시면 습기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커피의 이뇨효과로 인해 중독되면 소변을 많이 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일부 의료인들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이 비난문은 “아무리 풍만하고 멋진 여성이라도 욕망을 해결해 줄 남자를 찾지 못하고 억누를 수밖에 없기에 초췌해지게 됩니다.”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여인숙에 누워 꿈꾸는 남성들의 상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선술집 주인들은 커피하우스에 손님들을 빼앗긴다고 걱정했다. 탄원서를 작성한 진짜 동기는 맨 마지막 문장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저희는 60세 이하의 모든 사람이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해주시길 간청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네피 맥주집과 코크 선술집 이용을 권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커피보다 맥주를 좋아한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대왕은 커피가 국가의 출산력과 건강을 악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1777년 “나의 신하들이 커피를 점점 더 많이 마시는 모습은 보기에 좋지 않다. 그로 인해 이 나라의 돈이 밖으로 나가게 된다. 나의 국민들은 맥주를 좋아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물론 정반대 입장에 선 경우도 많이 있었다. 커피는 예술가와 정치가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많은 행운을 안겨주었다. 커피의 발견은 이시도르 부르동의 표현처럼 환상의 세계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자유와 문화, 상거래, 그리고 이성의 세계도 확대시켰다. 이 모두가 더욱 많은 희망의 약속이 되었다. 19세기 위대한 수학자들 중 한 명인 폴 에르되시(Paul Erdos)는 이렇게 말했다. “수학자는 커피를 이론으로 만드는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는 여느 수학자들보다 많은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커피를 마셨을지 상상할 수 있다.
베토벤 역시 커피애호가였는데, 그는 직접 만드는 커피 한 잔에 정확하게 60개의 커피콩이 들어가게 했다 (현대의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에는 50~55개 정도의 커피콩이 필요하다). <커피칸타타>를 작곡한 바흐는 “달콤한 커피 맛이여, 수천 번의 키스보다 짜릿하며, 머스캣포도 와인보다도 부드러워라.” 라는 후렴을 음악에 넣기도 했다(이 정도 맛이 되려면 얼마나 좋은 커피여야 할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가 문학적 업적을 이루는 데는 매일 60잔씩 마신 커피(거의 치사량에 해당하는 카페인이 포함되었을 것이다)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커피가 위장으로 들어가자마자 전반적으로 고조된다. 생각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비유가 떠오르고 원고지가 메워진다. 커피는 나의 동반자가 되며 글쓰기를 멈추기가 어렵다.”
커피를 적당히 마시면 좋은 점이 많다는 사실은 현대과학으로 확인되었는데, 이는 이미 몇 세기 전부터 애호가들이 주장했던 것이다. 카페인은 아데노신이라는 물질의 활동을 차단하는데, 이것은 중추신경계 기능을 조절하는 중요한 물질이다. 아데노신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축적되어 잠을 자게 만드는데, 카페인이 아데노신의 이 같은 기능을 차단하므로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다. 과학적 용어로 말하면 카페인을 조금 혹은 중간 정도 섭취하면 “각성도와 경계상태를 높이고 운동 활동을 증진시킨다. 수면 욕구를 감소시키고, 만족감과 활력을 얻으며 인지 능력이 강화된다.”
많은 상업기구와 과학기구들이 커피하우스를 씨앗으로 하여 싹텄다. 현재 세계 최대의 보험조합으로 성장한 런던의 로이드 해운보험회사는 같은 이름의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고, 런던의 증권거래소는 익스체인지앨리의 조나산 커피하우스에서 출발했다. 최초의 주식 공매는 미국 보스턴의 머천트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뉴욕의 주식거래는 월스트리트의 톤틴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런던 왕립학회는 틸야드 커피하우스에서 창립되었다.
커피와 커피하우스는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파리의 커피하우스는 프랑스혁명이 구상된 장소였으며, 미국 보스턴의 그린드래곤이라는 커피하우스 겸 여인숙은 미국독립전쟁의 거점이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보스턴에는 영국 왕정주의자들이 출입하는 커피하우스도 많이 있었는데 '브리티시'도 그중 하나였다. 마침내 영국이 패배하자 '브리티시' 커피하우스는 즉시 그 이름을 '아메리카'로 바꾸었다.
커피가 문화에 영향을 끼쳤듯이, 문화도 커피에게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이 특정 커피를 대량 재배하게 되면서 커피나무의 유전학적 다양성은 내내 감소해 왔다. 자바에서 가져온 커피나무 한 그루가 네덜란드의 한 식물원에서 재배되고, 이 한 그루의 나무로부터 티피카 종의 커피나무 수백만 그루가 전 세계에 자라게 되었다.
커피나무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혁은 19세기 말 루드비히 로젤리우스(Ludwig Roselius)라는 독일인이 카페인 없는 커피를 추출해 팔면서 시작되었다. 카페인 없는 커피가 커피 시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2004년 커피 육종업자들은 카페인이 없는 커피콩을 생산하는 커피나무를 발견하여 이 품종을 보급했다. 오랫동안 커피 씨앗은 사람들의 문화에 많은 변화를 일으켜왔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커피 문화가 커피나무를 선택하고 전파하고 있다.
저자: 조나단 실버타운 (Jonathan Silvertown) 영국 오픈유니버시티(The Open University) 생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2005년 식물의 다양한 진화와 식물의 보존을 다룬 『에덴의 악마: 식물의 다양성에 관한 패러독스Demons in Eden: The Paradox of Plant Diversity』를 출간함으로써 많은 학자들과 과학 관련 언론매체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주로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 같은 생태학 관련서적을 출간하는 그의 다른 책으로는 『99% 원숭이: 진화의 비밀99% Ape: How Evolution Adds Up』(2009), 『허약한 생태계Fragile Web: What Next for Nature?』(2010) 등이 있다. |
※이 책은 한국간행물 윤리위원회의 2011년 2월 이달의 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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