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택 속에 숨어 있는 전통과학 안내책자’ 프로젝트

2011년 10월 26일(수)

출처 : 사이언스타임즈

자연과 잘 어우러진 고택들. 이 아름다움 속에 어떤 전통과학이 숨어 있을까. 한국과학창의재단은 2011 융합문화지원사업 중 하나로 ‘우리나라 고택 속에 숨어 있는 전통과학 안내책자’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책임자인 동아사이언스 양길식 과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옥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지만 옛날 집으로만 접근하고 있어요. 역사만 얘기할 뿐이죠. 이제는 과학적인 측면을 언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고택은 겉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창의적이지 않았다면 만들 수 없는 융합의 산물입니다.”

과거 한옥 한 채가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재료를 구하는 데도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집을 짓는 기술자인 도편수와 주인이 집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주인은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담은 한옥을 지을 수 있었다”며 “한옥마다 내부구조가 다른 것도 이 때문”이라고 양길식 과장은 말했다.

고택의 숨은 또 다른 매력은 과학이다. 고택들의 배치를 보면 앞에는 물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 ‘배산임수’ 형태이다. 대개 사람들은 ‘배산임수’가 풍수지리에 의한 명당 찾기라 생각한다. 하지만 ‘배산임수’는 바람의 길을 열어 냉·난방을 해온 조상들의 지혜이다.

한옥에 스며 있는 조상들의 과학 지식

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으로 분다. ‘배산임수’는 여름날 집 앞 물 주변의 시원한 공기가 집안의 더운 공기를 이동시키도록 배치한 것이다. 여름에 한옥이 시원한 이유다. 겨울에는 반대현상이 일어나지만 집 뒤 산이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집안이 따뜻하게 된다. 양 과장은 “한옥이 평지에 지어졌다면 덥고 추운 구조였겠지만 배산임수로 지어지면 시원하고 따뜻한 집이 된다"고 언급했다.

고택에서는 음식을 보관하는 ‘광’도 바람을 이용하여 배치했다. 보통 두 개의 광이 팔(八)자 모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데 시원한 물바람이 빨리 들어가 더운 바람을 밀어내기 쉽도록 고려한 설계이다. 차가운 공기의 흐름이 더운 공기보다 빠르다는 ‘베르누이 정리’가 적용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차가운 공기가 들어가는 입구가 넓기 때문에 ‘광’ 근처는 언제나 시원하다. 한마디로 냉장 효과인 셈이다.

한옥은 땅을 훼손하지도 않았다. 그는 “집터에서 기단을 놓아 짓는데, 땅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햇빛이 마당에 반사돼서 처마 밑으로 들어오도록 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고택에 잔디가 심어져 있지 않은 것도 간접조명을 극대화하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밖에도 설계를 땅이 아닌 공간에서 시작한다던지, 창호의 넓이와 지붕의 높이에도 인체공학을 적용한 것과 같은 꽤 놀라운 과학이 고택에 들어 있다.

개인 정원으로 자연을 끌어온 구조

구들바닥 안에는 연기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방 안 곳곳을 덥히는 역할을 했다”고 양 과장은 말했다. 뿐만 아니라 “구들은 예절·인성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고 예찬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랫목에서 놀다가도 부모님이 오시면 윗목으로 가고 부모님을 아랫목으로 모시도록 하는 ‘어른 공경’ 교육은 한옥에서 나온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양길식 과장은 “고택은 자기 집 정원으로 자연을 끌어온 집”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한옥의 창호는 차경방식이다. 차경은 말 그대로 ‘풍경을 빌린다’는 뜻이다. 문을 열면 문틀이 액자틀 역할을 하면서 풍경이 하나의 액자가 되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거기에다 고택은 그 건물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다. 양 과장은 “아흔아홉 칸을 자랑할 만큼 크고 화려한 과거가 있는가 하면, 파란만장한 국가의 근현대사처럼 굴곡진 삶의 스토리가 있다”면서 “고택을 풍성하게 만드는 한 요소로 그 고택만을 묶어서 관광 상품을 여러 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 다른 한류 바람이 됐으면

양길식 과장이 이 프로젝트를 제안한 이유는 또 다른 ‘한류’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고택에서 하룻밤 자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재 ‘옛날 집에서 하룻밤 나기’밖에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고택 곳곳에 숨겨진 비밀을 안다면 아주 재미있는 장소로 외국인들에게 어필되어 또 다른 문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 과장은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보람도 있었지만 아쉬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고택 소유자들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해서 설명해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책자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 지금은 한국어만 진행하고 있다.
 
안내책자에 소개된 고택이 10채뿐이라는 점도 양길식 과장을 안타깝게 만드는 요소이다. “마음 같아서는 앞에 화보집을 더 싣고 스토리와 과학적인 내용도 많이 넣어 두껍게 만들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고 속마음을 드러냈다.

“우리나라에는 약 700채 정도의 고택이 있습니다. 모두 희노애락을 품고 있고 과학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꾸준히 발굴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죠.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사업을 계속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할 것입니다.”

김연희 객원기자 | iini0318@hanmail.net

저작권자 2011.10.26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