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 아래
황매천의 사당 앞에서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높은 목소리만이 들리고
사방이 어두울수록
큰 몸짓만이 보인다
목소리 높을수록
빈 곳이 많고
몸짓 클수록 거기
거짓 쉽게 섞인다는 것
모르지 않으면서
자꾸 그리로만 귀가 쏠리고
눈이 가는 것은
웬일일까
대나무 깎아 그 끝에
먹물 묻혀
살갗 아래 글자 새기듯
살다 가는 일은
서러운 일이다
낮은 목소리 작은 몸짓으로
살갗 아래
분노를 감추고
살다 가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아침 저녁
짙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노고단을 우러르면서
노고단 아래가 '勞苦단' 아래같다. '길'이라는 시집은 창비시선 목록으로 1990년 출간되었다. 세상에 나온지 20년을 훌쩍 넘는 시가 요즘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듯하다. 한국사회는 진화하지 못한 것일까? 길 위에 흩뿌려져 있는 누추한 삶의 애환이 휑하니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초봄의 짧은 생각
영해에서
바닷바람은 천리 만리
푸른 파도를 타고 넘어와
늙은 솔숲에서 갈갬질을 치며 놀고
나는 기껏 백 리 산길을 걸어와
하얀 모래밭에
작은 아름다움에 취해 누웠다
갈수록 세상은 알 길이 없고
*갈갬질 : 가댁질
아이들이 서로 잡으려고 쫓고, 이리저리 피해 달아나며 뛰노는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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