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 아래

 

황매천의 사당 앞에서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높은 목소리만이 들리고

사방이 어두울수록

큰 몸짓만이 보인다

목소리 높을수록

빈 곳이 많고

몸짓 클수록 거기

거짓 쉽게 섞인다는 것

모르지 않으면서

자꾸 그리로만 귀가 쏠리고

눈이 가는 것은

웬일일까

 

대나무 깎아 그 끝에

먹물 묻혀

살갗 아래 글자 새기듯

살다 가는 일은

서러운 일이다

낮은 목소리 작은 몸짓으로

살갗 아래

분노를 감추고

살다 가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아침 저녁

짙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노고단을 우러르면서

 

노고단 아래가 '勞苦단' 아래같다. '길'이라는 시집은 창비시선 목록으로 1990년 출간되었다. 세상에 나온지 20년을 훌쩍 넘는 시가 요즘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듯하다. 한국사회는 진화하지 못한 것일까? 길 위에 흩뿌려져 있는 누추한 삶의 애환이 휑하니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초봄의 짧은 생각

 

영해에서

 

바닷바람은 천리 만리

푸른 파도를 타고 넘어와

늙은 솔숲에서 갈갬질을 치며 놀고

나는 기껏 백 리 산길을 걸어와

하얀 모래밭에

작은 아름다움에 취해 누웠다

갈수록 세상은 알 길이 없고

 

*갈갬질 : 가댁질

아이들이 서로 잡으려고 쫓고, 이리저리 피해 달아나며 뛰노는 장난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핀란드 슬로우 라이프  (0) 2015.03.17
중국, 세계로 가다  (0) 2015.03.03
가장 사소한 구원  (0) 2015.02.10
TRAVEL NOTES 끌림 이병률 산문집  (0) 2015.02.10
이슬람 바로보기 Knowing Islam  (0) 2015.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