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벡위드 지음

이민주 번역

토네이도 펴냄

 

 

 

 

 

 

 

 

 

 

 

 

 

 

 

 

 

 

 

 

바바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번역

부키 펴냄

 

 

 

 

 

 

 

 

 

 

 

 

 

 

 

 

 

 

 

 

 

 

언씽킹 unthinking, 이 책은 인간이란 생각하는 존재로서 꽤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것이란 생각은 그저 착각임을 알게 해준다. 착각보다는 '자뻑'이라는 말이 더 '삘'이 오는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을 선택하며, 매력적인 사람들이 더 똑똑하고 모든 일에서 평균보다 나을 거라는 근거 없는 신념을 갖고 있고, 느낌에 근거해 결정하고 난 후에 결정을 뒷받침할 근거를 모으는 존재라고 책은 말하고 있다.

 

또 인간은 어디의 일부가 되길 바라면서 동시에 개별적이길 바라는 모순덩이이며, 단순한 것에 끌리고 놀이와 놀라움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스토리로 승부하라는 둥 승부하겠다는 둥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우 이지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동물적 본성에 더 의지하고 그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근거에 의거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느낌과 경험의 작용이 크다는 관점에서 읽는다면 긍정의 배신으로 입는 상처는 크지 않을 것이다. 또 누가 봐도 똑똑한 사람들이 얼토당토 않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거나 보통의 나쁜 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도 이해하기 쉬워질 것 같다.

 

긍정의 배신은 '긍정'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미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미국 따라하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역시 긍정이 거의 이데올로기처럼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물론 매사 투덜거리고 비관적인 것보다는 감사하고 낙관적인 것이 인정상 더 바람직하다. 하지만 물잔에 물이 반밖에 안남았는지 물이 반이나 남았는지로 무엇을 판단하겠다는 건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론다 번의 시크릿이 크게 유행했었다. 저 책들이 설파하고 있는 긍정과 시크릿이 얼마큼이나 인생을 변화시켰는지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없을 것이다. 우린 그저 조엘 오스틴과 론다 번에게 인세만 두둑히 줬을 뿐이다.

 

조엘 오스틴은 기독교를 흐렸을 뿐이고 론다 번은 사람들을 그럴싸하게 홀려 자기 주머니만 채웠을 뿐이다. 사실 그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양자역학에 잠시 혹했었다. 그런데 그 양자역학에 근거한 시크릿에서 말한 대로 끌림의 법칙을 믿고 우리의 생활환경에 소지섭이나 브래드 피트를 위한 공간을 만든다 할지라도 소지섭의 털끝하나 우리에게 오지 않고 안젤리나 졸리 눈에서 눈물 한 방울 뺄 수 없다. 소지섭과 안젤리나 졸리는 과장된 예일 수도 있으나 오스틴과 번의 설파하는 내용대로라면 이 과한 것들이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두 손을 꽉 쥐고 예스를 생각하십시오. 이 행성을 두 발로 단단히 디디고 서세요. 예스라는 생각을 떠올리세요.'

 

'머릿속으로 '사랑합니다'라고 항상 말하십시오. 그러면 치유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 치유됩니다.'

 

이런 코칭을 받으며 감격하며 긍정의 힘을 맹신하기 이전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한 번 뒤집어 생각해 보고 짚어본다면 에런라이크의 다른 책 '노동의 배신'에서 만나는 불합리한 일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언씽킹은 좋은 주제를 던져주고 있지만 책에 나열되는 예들이 미국사람들이나 친숙한 것들이어서 집중력이나 흡입력도 떨어뜨리고 책 자체의 보편성도 갉아 먹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차가워지는 날씨,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차가운 머리로 언씽킹과 긍정의 배신을 읽으면 통찰력을 증강함이 느껴질지도.

 

 

 

 

 

언씽킹 Unthinking
이민주 역/해리 벡위드 저
긍정의 배신
전미영 역/바버라 에런라이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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