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배 지음
북하우스 펴냄

어느 날 교보문고를 어슬렁거리다 집어 온 책이다, 눈길을 건너는 이의 모습과 그를 감싸고 있는 풍경 저쪽의 아련함에 마음이 끌렸다

어느 계절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특별히 좋아하는 계절이 없다 말하곤 했지만 어쩌면 겨울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겨울에 여름 풍경을 보며 그 계절의 느낌을 떠올리는 순간보다 여름에 겨울 풍경을 보며 떠올리는 느낌이 깊게 깊게 나를 파고드니까

위아래로 길쭉한 일본은 우리보다 눈이 풍성한 곳이 많나 보다, 일본의 그 풍성한 설경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국적이지만 낯익은 그곳의 설경,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오래된 목조 건물 위에 두툼하게 쌓인 눈, 눈쌓인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 풍경에 마음이 뺏긴다, 우리에게 매혹적인 이 설경은 그 속에서 일상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견뎌내야 하는 겨울의 혹독함일지도 모르겠다, 그 일상의 어려움은 모든 것이 눈에 묻혀 있듯 이방인에겐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을 살 때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나기 전이었다. 쌓인 눈을 보며 노천 온천을 즐기기 전에 일본의 설국을 만나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 업어 온 책이었다. 이젠 이 책은 일본 겨울 노천 온천과 설국에 대한 마음을 떨쳐주는 역할을 했다

일본에선 주부, 도호쿠, 홋카이도가 눈이 많은 곳인가 보다,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유민이 출연한 영화 설국의 그 곳은 물론 아이리스의 아키타,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 러브레터의 오타루를 만날 수 있다, 물론 완전히 낯선 곳도 함께

러브레터, 하얀 눈밭에서 떠난 연인을 향해 외치던 오겡끼데스까, 그 영상이 재생된다, 그 장면은 마치 조용히 쌓이는 눈처럼 싸분히 마음에 내려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영상을 던져 준 이 영화의 또 다른 후지이가 지나간 사랑에 마음 아파할 때 고스란히 그녀와 그녀의 아픔을 품어주던 구반별저가 2007년 전소되었다는 구절에 작은 신음이 절로 토해졌다 

 

                



일본의 최북단 땅끝 소야미사키宗谷岬에 이르러서 허니와 클로버의 타케모토가 생각났다. 자전거에 오른 타케모토는 무작정 페달을 밟아 달리고 달려 북해도 끝까지, 일본의 땅끝까지 달린다. 계획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달리던 그 길에서 방황하던 청춘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할 일을 찾는다. 타케모토가 달릴 때 나도 같이 내달리고 싶었다. 타케모토가 맞는 바람을 내 가슴 가득 안고 달리다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은 찌꺼기 하나 남지 않고 다 털려 나가고 종착지가 된 그곳이 출발지가 되어 되돌아 달려오는 길은 새로운 길이 될 것만 같았다.

 


                

             


지칠 때까지 페달을 밟아 간 곳에 번민의 답은 없다, 그저 새로운 풍경을 눈에 마음에 담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마음을 달래주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되고 빛이 된다. 묘하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이 되고, 타인의 일상을 나의 일상을 벗어나 들여다 보며 스치고 지나오는 것일 뿐인데 그 여행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쉬겠다며 내 일상을 벗어나 타인의 일상을 본다는 것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떠나고 싶다는 욕구를 잠재우기엔 여행에 대한 회의는 미약하기만 하다

처서를 지나 추석을 향해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곧 겨울을 만날 것이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돌만큼 차가운 기운이 대기를 가득 채울 것이고, 그 냉기 속에서 만나는 따뜻한 어묵 국물이나 커피 한잔이 주는 따스함에 마음이 놓일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어 여행이 멋질 것이다, 이 책의 작가도 '나는 돌아갈 고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돌아올 이 곳 내 자리를 남겨두고 잠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풍경에 '널 볼 수 있어 다행이구나, 이제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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