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저
생각의 나무 펴냄



김훈 하면 대한민국에서 나름 유명한 작가다. 책이 두텁지만 내용이 많아서가 아니다. 글씨는 크고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비율도 적어 여백이 많은 책이 현의 노래이지만 작가의 지명도를 생각하며 참았다.

예전 국민일보에서 가끔 작가의 글을 읽었던 것을 제외하곤 현의 노래가 처음 읽어보는 작가의 작품이다. 사람들이 작가 김훈을 좋아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으나 솔직히 작가가 왜 지금만큼의 추앙을 받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읽는 내내 이것이 현의 노래인가 쇠의 노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 죽임당한 대장장이 야로와 자연사한 악사 우륵의 결말로 인해 현의 노래가 이 책의 제목인가 보다 하며 나름의 납득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우륵, 야로, 이사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아라와 가야왕과 태자 그리고 그 왕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문학 잘 모르는 이 독자 보시기에 3인이 주인공이라 생각된다. 소리를 만드는 우륵, 쇠를 만드는 야로, 쇠로 싸우고 소리로 위로받는 이사부...그들은 각자의 것으로 세상을 읽고 발걸음을 옮긴다.

이 책의 미덕은 외래어 없이 우리의 정서와 생각을 다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 국어를 잘 썼다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가야, 신라 그 시절의 이야기니 외래어가 나올리 없지 않냐는 반박은 집어 삼켜 주시겠다.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본다. 우리말은 얼마나 빈곤한가. 우리가 사용하지 않고 묻어둔 우리말 중에 우리를 잘 표현해 줄, 그것도 다채롭게 표현해 줄 말들이 넘쳐날 것이다. 어줍잖은 세계화와 외국어가 말이라는 정체성을 헤집고 있는데 우린 너무 무방비한 것도 모자라 둔감하지 않나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덜 빈곤한 국어를 사용하는 작가님이지만 우륵이 춤을 추는 모습이나 소리에 대한 묘사는 상상의 나래를 펴기엔 벽이 많았고, 백제와 신라의 전투 묘사도 전쟁터의 살의나 긴박감을 전해주지 못했다. 우륵도 니문도, 야로도 이사부도 그저 심심하다. 우륵의 동거녀 비화는 그저 발정난 여인에 불과해 보이며 아라가 등장할 때는 오줌 누는 일에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그녀들은 자기 가슴을 왜 그리 안아대는지 공감, 동감은 커녕 이해도 안된다.

우륵도 야로도 가야를 버리고 신라에 투항한다. 우륵은 가야를 버렸다. 그런데 가야의 소리를 배운 신라인이 가야의 소리는 번잡하고 아정하지 못하다 했을 때 버럭한다. 가야를 버린 자가 가야의 소리가 혹평을 받는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아니면 그 가야의 소리는 자기가 정돈하고 만들어낸 소리이기에 그런가? 우륵의 예술혼이나 남다른 반골기질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이래 저래 실망이다.

다만 책을 읽으며 과거든 현재든 사람의 생이란 척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싸움으로 삶의 터전이 이 나라의 땅에서 저 나라의 땅이 되기도 한다. 이 나라 사람에서 저 나라 사람으로 되는 것, 이것이 만들어내는 삶의 불안요소들, 싸움의 와중에 맞는 예기치 못한 운명. 불확실성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인가? 가야의 왕자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쳤으나 결국엔 세상의 버림을 받은 인물이지 싶다. 한번은 순장을 피했지만 결국 순장당한 아라의 삶도, 마당에서 죽어 키우던 닭들에게 살점이 쪼이는 비화나 전쟁터에서 개죽음 당하는 자들, 과연 태어나 생명을 얻고 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맴돌뿐이다.
우륵은 니문에게 소리는 살아있을 때만 그 의미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처럼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갖는 의미로서의 의미말이다.

이 책이 영화화 된 것 같다. 배우 이성재가 우륵으로 분한 듯 하다. 과연 이 책은 어떤 영상으로 만들어졌을까 살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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