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갈라파고스 출간


말과 글을 단련하고 숫자, 언어,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을 이 책에서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이 말이 있든 없든 이 책을 읽은 나의 최종 감상은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엔 촘스키가 없다, 물론 아예 없지 않다, 두어번 나온다. 하지만 촘스키가 주인공도 아니고 조연도 아니다. 책은 제목으로 절반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체감되는 책이다. 촘스키처럼 생각할 수 있으려면 어찌 해야하는지...알고 싶어진다. 그렇게 제목에 낚여 이 책을 구입하고 읽어가다보니 촘스키 가라사대가 아니다. 촘스키 가라사대가 아니라 할 지언정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다만 원서가 궁금하다.

 

아마존에서 찾은 원서는 이 꼬라지였다. 원제목은...지적인 자기 방어 단코스...이 제목대로 서점에 나왔다면 바로 매장당했을 것 같다. 책 표지도 정 안가기는 마찬가지다, 의미야 있겠지만 딱 보면 그저 해괴할 뿐...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책들이 예쁘다, 한편으론 각박한 독서 환경에서 책으로서 팔리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처절하다는 생각도 물론 들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 책은 원서를 잘 포장하고 정돈해서 내 놓았슴을 굳이 중얼거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지적인 자기 방어...자기 방어를 '지적'으로 하려면 일단 세상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들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비판적으로...흔히들 하는 말로 비판적이되 생산적인...하지만 매사 그런 식으로 회의하고 비판하다보면 주변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그렇게 만날 한 번 꼬아서 듣는 이유가 뭐냐며 성격 나쁘다고 한 마디 얻어 듣거나 더 나아가선 배척당하거나 따 당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상황에 따라 무슨무슨 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일 것이다. 불법체류자는 다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면 국수주의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의심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나치의 대중계몽 및 선전부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남긴 말이다. 이 말은 촘스키처럼....에 쓰여 있다. 괴벨스의 말은 회의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1장 시작 부분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또다른 동기부여가 되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기 위해 배치를 잘 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괴벨스로 돌아가면,

반복해서 세뇌하고 또 상대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면, 정사각형을 원이라고 믿게 만들수 있다. '원'과 '사각형'이란 게 결국 무엇인가? 단어에 불과하다, 단어에 담긴 뜻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까지 단어는 조직될 수 있다.

괴벨스의 말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만나는 매체들을 생각해보면 같은 일을 두고 언론들은 서로 다르게 기술한다. 그 다름은 각 언론들이 조직해 놓은 단어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어떤 것을 읽고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자기의 시각과 생각들이 자라는 것이다.

KBS 시청료 인상안 통과를 민주당이 저지했다. KBS 뉴스에서 기자는 민주당을 비난하면서 시청료 인상안이 통과되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라고 보도했다. 민주당이 나쁜 당이든 좋은 당이든 그 사실은 둘째 치고 KBS 본부의 시청료 인상안이 통과되지 못해 위기감을 느끼는 국민이 있을까? 하지만 그저 들려주는 대로 그 기자가 보도해 주는 바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위기라고 생각될 것 같았다. 믈론 다음날 KBS가 민주당을 도청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다음날 그에 대한 이어진 뉴스는 인터넷 포털에서 못봤다. 시청료를 올려받고 싶다면 어떤 형태로 다시 나오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 글을 쓰는 시간까진 못봤다.

보고 듣는 것들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거나 혹은 여과했으나 이상한 필터에 의한다면 세상이 굴절되고 왜곡되면서 불합리, 모순과 같은 것들이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똑바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좀더 지적인 반응이 요구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자기방어에서 자기는 일개 개인은 물론 개인이 속한 사회, 국가, 세계로 당연히 확장된다고 본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필요한 것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마무리로 인용한 칼 세이건의 미묘한 균형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모순되는 두 욕구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가정을 끈질기게 의심하면서 꼬치꼬치 따져보려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욕구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의심하기만 한다면 어떤 새로운 생각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마저 상실해서, 별난 것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푸념하는 괴팍한 노인으로 늙어갈 것이다(그렇다고 당신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반면에 당신이 무엇이든 믿고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유용한 생각과 무가치한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추락할 수 있다. 모든 생각이 똑같이 타당하다면, 그래서 어떤 생각도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면, 당신이 나아갈 방향을 어떻게 선택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