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읽기



통한의 실패!
수충이 늦은 이유

慶長5年(1600)9月15日、日本を二分する天下分け目の合戦が行われました。「関ヶ原の戦い」です。徳川家康率いる東軍、およそ7万5,000。一方、石田三成率いる西軍、およそ8万。両軍合わせて15万を超える大軍が激突したこの合戦は、家康の巧みな裏切り工作により、東軍の勝利で幕を閉じます。

경장(케이쵸) 5년(1600) 9월 15일, 일본을 양분하는 승패의 갈림길에 있는 전투가 이루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덕천가강이 통솔하는 동군, 약 7만 5천. 한편, 석전삼성이 통솔하는 서군, 약 9만. 양군을 합쳐 15만이 넘는 대군이 격돌했던 이 전투는 가강(이에야스)의 교묘한 배신공작에 의해 동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しかしこのとき、決戦の地・関ヶ原に、徳川家の嫡男・秀忠の姿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の理由は“遅参”です。現代日本においても、遅刻は厳禁。会社や学校をはじめ、さまざまな場面で“スケジュールを守る”ことが求められます。当然、秀忠も、徳川家の命運をかけた一戦に遅れることがどれほどの過ちなのか、自覚していたでしょう。それではなぜ、秀忠は合戦に遅れ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

秀忠が「関ヶ原の戦い」に遅れた理由は、大きくわけて2つあります。まず一つ目は、“真田昌幸・幸村親子に対する油断”です。小山評定のあと、東海道を進む家康が、3万の軍勢を率いて本拠地・江戸をたったのは9月1日のこと。このとき秀忠は、家康を上回る3万8,000の軍勢を率いて中山道を西へ進み、信濃・軽井沢に到着していました。しかし、翌2日、秀忠は進路を北に変え、小諸に向かいます。理由は、西軍についた真田昌幸の居城・上田城を攻略するためです。

그러나 이 때, 결전의 땅 세키가하라에 덕천(도쿠가와)의 적자 수충(히데타다)의 모습은 없었다. 그 이유는 지각이다. 현대 일본에 있어서도 지각은 엄금. 회사나 학교를 비롯해 여러 장소에서 스케쥴을 지킬 것이 요구되고 있다. 당연히 수충도 덕천 가의 운명을 건 일전에 늦은 것이 어떤 과오인진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충(히데타다)는 왜 전투에 늦었던 것일까?

수충이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은 이유는 대별하면 2가지이다. 우선 "사나다 마사유키(진전창행), 유키무라(창촌) 부자에 대한 방심"이다.  오야마 평정 후 동해도(토카이도)로 전진하는 가강(이에야스)이 3만의 군세를 이끌어 본거지 에도를 지난 것이 9월 1일. 이때 수충(히데타다)은 가강(이에야스)를 상회하는 3만 8천의 군세를 이끌고 중산도(나카센도우)로 서쪽으로 진군하여 시나노·카루이자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2일 수충은 진로를 북으로 변경하여 코모로로 향한다. 이유는 서군에 붙은 사나다 마사유키의 거성 우에다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이다.


相手はせいぜい2,000ほどの軍勢。大一番を前にした景気づけに簡単に落とせるとでも考えたのでしょう。しかし、相手はあの武田信玄に「我が目」といわしめた智将・真田昌幸。実戦経験のほとんどない秀忠は昌幸の老獪(ろうかい)な手口に翻弄され、偽りの和平交渉で2日、その後の城攻めは成果のないまま4日、計6日も足止めをくらってしまいます。秀忠の判断ミスと言わざるを得ません。

상대는 고작 2000정도의 군세. 중요한 승부에 앞서 기세좋게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 타게다 신겐(무전신현)에게 '나의 눈'이라고 말하게 한 지장(智將) 사나다 마사유키.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수충(히데타다)는 마사유키(창행)의 노회한 수단으로 농락되어 허위 평화교섭으로 2일, 그후 성과도 없는 채로 공성 4일, 총 6일 동안 발이 묶여 버린다. 수충의 판단 미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そして二つ目は、“本多正信への不満”です。秀忠軍には、軍監ともいうべき本多正信をはじめ、「徳川四天王」のひとりに数えられる榊原康政、知勇に秀でた大久保忠隣など、そうそうたるメンバーが従軍していました。役者は十分です。しかし、正信は武功派の武将たちからの評判が悪く、「正信はみそや塩の勘定ばかりをしている」と陰口をたたかれるような存在。おそらく、榊原康政、大久保忠隣らは、正信の指揮下に入ることを快く思っていなか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団結力を欠いてしまっては、いくら大軍を擁しても、成果は上がりません。

9月9日、上田城攻めを諦め、再び中山道に戻って軍を西に進めた秀忠。しかし、9月15日の合戦には間に合わず、9月17日、信濃・妻籠宿(つまごじゅく)で東軍勝利の知らせを受け取ることになります。

그리고 두 번째는 "혼다 마사노부(본다정신)에 대한 불만"이다. 수충 군에는 군감이라고 해야할 혼다 마사노부를 비롯해서 '도쿠가와 사천왕'의 한 명인 사카기바라 야스마사,  지용이 뛰어난 오쿠보 타다치카 등 쟁쟁한 멤버가 종군하고 있었다. 주역 배우들은 충분했다. 그러나 마사노부는 무공파 무장들에게 평판이 나빠 '마사노부는 된장이나 소금 셈만 하고 있다'고  험담을 당하고 있는 존재. 필시 사카기바라 야스마사, 오쿠보 타다치카는 마사노부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기껍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단결력이 결여되어서는 아무리 대군을 거느려도 성과를 올릴 수 없다.

9월 9일 우에다 성 공격을 마치고 다시 나카센도우로 돌아온 군을 서쪽으로 진군시킨 수충. 그러나 9월 15일의 전투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9월 17일 시나노・츠마고쟈쿠에서 동군의 승리 소식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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