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연보

1601년 高次と初、キリシタンの洗礼を受ける。
타카츠구와 하츠, 크리스찬 세례를 받다.


고우읽기 36화

결전에 늦은 수충(히데타다), 가강(이에야스)에게 혼났다는 것이 사실일까?



徳川家の命運を懸けた「関ヶ原の戦い」に間に合わなかった秀忠。その事実を知らされたとき、「大変な失態をしてしまった」とさぞやショックを受けたことでしょう。そのときの様子について『台徳院殿御実紀』巻一には、「大におどろかせられ」とひと言記されるのみ。しかし、それまでこれといった大きな失敗もなく、家康から叱責されることもなかった秀忠。家康からどんなことを言われるのか、恐怖で身がすくむ思いだ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の後、「早く家康に会って、今回の失態をわびなければ」との思いで、昼夜を問わず中山道を進軍した秀忠は、9月20日、初の夫・京極高次の居城がある大津で家康に追いつきます。そして、すぐさま父・家康に面会を求めました。

덕천(도쿠가와) 가의 운명을 건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은 수충(히데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실수를 해버렸다'라며 필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 상황에 대해서 〈대덕원전어실기〉제2권에 '크게 놀랐다'고 한마디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렇다할 큰 실패도 없고 가강(이에야스)에게 칠책당한 적도 없었던 수충(히데타다). 가강(이에야스)에게 어떤 말을 들을까 공포로 몸이 움츠러들지는 않았을까. 그 후 '빨리 가강과 만나 이번의 실수를 사죄해야지'라고 생각해 밤낮없이 중산도(나카센도우)를 진군한 수충(히데타다)는 9월 20일 하츠의 남편 경극고차(쿄코쿠 다카츠쿠)의 성이 있는 대율(오오츠)에서 가강(이에야스)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즉시 아버지 가강(이에야스)에게 배알을 청했다.
 台徳院殿御実紀

しかし、家康はこれを拒否。「御不予」、すなわち、「気分がすぐれない」という理由で、秀忠からの面会要求を断っています。このとき、家康が面会を許さなかったのは、秀忠の失態を怒っていたからだとする資料もありますが、実際はどうだったのでしょうか? 待たされたのが何日なのか、家康と秀忠の仲を取りなした人物がいたのか、いたとすればそれは誰か、は資料によってまちまちです。
 そこで今回は、「関ヶ原の戦い」後に行われた家康と秀忠の対面について、諸説あるエピソードをいくつかご紹介します。

그러나 가강(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한다. '불예' 즉 '기분이 언짢다'는 이유로 수충(히데타다)의 배알요청을 거절한다. 이때 가강(이에야스)가 배알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수충(히데타다)의 실수에 분노하고 있어서라는 자료도 있으나 실제로는 어떤 이유에서일까? 며칠이나 기다렸는지, 가강과 수충의 사이를 수습했던 인물이 있었는지, 있었으면 누구였는지는 자료마다 구구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키가하라 전투'후에 있었던 가강과 수충의 대면에 대해서 모든 설에 있는 에피소드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가강(이에야스)은 화나지 않았다는 설

『東照宮御実紀』附録巻十一には、秀忠が待たされたのは1日で、誰のとりなしもなく、家康が「御不予」から「御快然」に変わったので面会を許したと記されています。しかも、面会のとき、秀忠が「大事の戦いに間に合わず、申し訳ありませんでした」と謝ると、家康は「参陣の期日を伝えた者の手違いもあろう。そう心を痛めることはない」と、かえって慰めの言葉をかけたとか。そしてさらに、「このたび供奉(ぐふ)した者の中に、上田城を攻めずとも、石田との戦いに勝てば、真田は降参してくると考えた者はいなかったか」と尋ねると、「戸田左門一西(かずあき)がそのように言っていました」という秀忠の回答に対し、戸田左門に恩賞を与えて応えたというものです。

これによると、家康は秀忠の遅参を怒っておらず、秀忠が大津に到着した日はたまたま調子が悪く、面会を1日延ばしただけ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동조궁어실기〉부록 12권에는 수충이 하루를 기다려 누구의 중재도 없이 가강이 불쾌에서 유쾌로 변하여 배알을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만났을 때 수충이 '중요한 전투에 시간을 맞추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사죄하자 가강은 '참전 날짜를 전했던 자의 잘못도 있었겠지. 그리 고통스러워 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번에 수행했던 자 중에 우에다 성을 공격하지 않고 석전(이시다)와 전투에서 승리하면 진전(마에다)는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자는 없었느냐'고 묻자, '토다사몬카즈아키)가 그렇게 말했다'고 수충이 답하자 토다사몬에게 상을 주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가강은 수충의 지각에 화내지 않고 수충의 오오츠에 도착한 날은 마침 몸이 좋지 않아 배알을 하루 연장했다는 것이 된다.

 


가강(이에야스)가 화가 나있어 중재자가 있었다는 설

1日遅れという点は同じですが、怒っていた家康が仲介者のとりなしで怒りを和らげ、21日に対面したというのが『台徳院殿御実紀』巻一の解釈です。ただ、間に入った人物については、本多正純とする説と榊原康政とする説の2つが併記されています。

まず本多正純とする説は、秀忠が家康に対面できないことを知った本多正信の子・正純が家康の前に進み出て、「今度の遅参は秀忠殿の過ちではなく、全て父・正信のしわざです。罰するなら正信を罰してください」と申し出たというものです。このころ、正純は父・正信に代わって家康の側近となっているため、その可能性は十分にあります。

次に榊原康政とする説ですが、秀忠に従って上田城攻めに参加した「徳川四天王」のひとり・康政が、家康に対して「秀忠に合戦の日をはっきり伝えていなかったからではないか」と言及。これにより、ようやく怒りを解いた家康が、秀忠と対面したというものです。『台徳院殿御実紀』附録巻一に、待たされたのは1日ではなく3日だったとした上で記されています。この後、康政が隠退していることを考えると、こちらもその可能性は十分にあります。

本当の真相は、いまだに歴史の闇の中です。

하루 뒤로 미루어 졌다는 것은 같으나 가강이 화가 나있는 가강이 중개자로 인해 화가 누그러지자 21일에 대면했다는 것이〈대덕원어전실기〉제1권의 해석이다. 다만 중재자에 대해서는 혼다 마사즈미라는 설과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라는 설 두 개가 병기되어 있다.

 

우선 혼다 마사즈미라는 설은, 수충이 가강을 대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 마사즈미가 가강에게 나아가 '이번의 지각은 수충의 잘못이 아니고 모든 것이 아버지 마사노부의 소위입니다. 벌하려면 마사노부를 벌하여 주십시오'라고 고한 것이다. 이 즈음에 마사즈미는 아버지 마사노부 대신 가강의 측근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라는 설이지만, 수충의 뜻에 따라 우에다 성 공격에 참여했던 '덕천사천왕' 중의 한 명인 야스마사가 가강에게 '수충에게 전투일을 확실히 알려주지 않아서이지 않은가'라고 언급. 이에 의해서 가까스로 화가 풀린 가강이 수충과 대면했다는 것이다. 〈대덕원어전실기〉부록 제1권에 하루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3일을 기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 야스마사가 은퇴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쪽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진실은 아직도 역사의 어둠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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