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연보



家康、征夷大将軍となり、江戸に幕府を開く。
江と秀忠の長女・千姫、大坂城の秀頼に嫁ぐ。


1603년
이에야스
정이대장군(세이이타이쇼군)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연다.
고우와 히데타다의 장녀 센히메, 오사카성의 히데요리에게 시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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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 7살에!
고우의 딸 센히메의 출가


慶長8年(1603)7月28日、日本中が注目するビッグカップルが誕生しました。新郎は、日本統一を成し遂げた元関白・豊臣秀吉の忘れ形見、秀頼11歳。新婦は、征夷大将軍に任じられた徳川家康の孫で、江と秀忠の長女、千姫7歳。現代日本では考えられない“ままごと”のような夫婦の誕生です。しかし、その裏では、大人の事情が複雑に交錯。今後の政権運営をめぐり、豊臣家と徳川家の間で巧妙な駆け引きが行われていました。今回は、江の娘・千姫の輿入れについて少し解説します。

케이쵸 8년(1603) 7월 28일, 일본 전체가 주목하는 빅 커플이 탄생했다. 신랑은 일본 통일을 이룬 칸파쿠 풍신수길이 남긴 아이 히데요리 11세. 신부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이며 고우와 히데타다의 장녀 센히메 7세. 현대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소꿉놀이"와 같은 부부의 탄생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어른들의 사정이  뒤얽혔다. 이후 정권운영을 둘러싸고 토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 사이에서 교묘한 교섭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고우의 딸 센히메의 출가에 대해 설명하겠다.

慶長5年(1600)9月15日、「関ヶ原の戦い」で石田三成率いる西軍に勝利した家康。しかし、これで家康が天下人にな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大坂城には、秀吉の遺児・秀頼がいまだに健在。東軍として戦った武将の中にも、福島正則、加藤清正ら豊臣恩顧の実力派大名が多数おり、家康は依然として「天下の家老」のひとりにすぎませんでした。

このとき、家康59歳、秀頼8歳。

 

케이쵸5년(1600)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휘하는 서군에 승리한 이에야스. 그러나 이것으로 이에야스가 천하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사카성에는 히데요시가 남긴 아들 히데요리가 여직까지 건재. 동군으로서 싸운 무장 중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카토 키요마사 등 토요토미가 특별히 아낀 실력파 다이묘가 다수 있어 이에야스는 여전히 '천하의 가노'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이에야스 59세, 히데요리 8세.

秀頼の母・淀をはじめ豊臣方は、
『今は家康がわがもの顔に振る舞っているが、それもあと数年。秀頼が15、16歳になれば関白となり、再び豊臣政権として動き出す』
と考えてい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しかし、慶長8年(1603)3月27日、淀のもとに衝撃的なニュースが飛び込んできます。家康の“征夷大将軍”への就任です。豊臣方にとっては、まさに青天の霹靂(へきれき)。家康に対する危機感をさぞや募らせたことでしょう。

そこで、家康が打ったしたたかな一手が「千姫の輿入れ」です。家康が愛孫・千姫を秀頼に嫁がせてきたことで一安心する淀。豊臣方、特に淀の神経を逆なでせず、将軍任官を認めさせるためには、必要不可欠な政略結婚でした。このとき、千姫はわずか7歳。母・江に付き添われて江戸城を出立し、5月15日に伏見城に入った千姫。その後、大坂城で秀頼との婚儀が行われたのは、7月28日のことでした。一説には、秀頼と千姫の結婚は秀吉の生前に決められていたといわれていますが、詳細はわかっていません。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를 필두로 토요토미 측은 '지금은 이에야스가 날치고 있지만 그것도 앞으로 수년. 히데요리가 15, 16살이 되면 칸파쿠가 되어 다시 토요토미 정권으로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케이쵸8년(1603) 3월 27일, 요도에게 충격적인 뉴스가 날아든다. 이에야스의 '세이이타이쇼군' 취임이다. 토요토미 측에겐 바로 청천벽력. 이에야스에 대한 위기감은 필시 더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야스가 내놓은 방법은  센히메의 출가이다. 이에야스가 사랑하는 손녀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한시름 놓은 요도. 토요토미 측은 특별히 요도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쇼군 임관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필요북가결한 정략결혼이었다. 이때 센히메는 불과 7세. 어머니 고우를 따라 에도성을 떠나 5월 15일에 후시미성에 들어간 센히메. 그 후 오사카성에서 혼례를 치룬 것은 7월 28일이었다. 일설에는 히데요리와 센히메의 결혼은 히데요리의 생전에 정해진 것이라고도 하지만 상세한 것은 모른다.

ちなみに、家康は淀を安心させるため、「千姫の輿入れ」のほかにもう一手打っています。それは、翌慶長9年(1604)に行われた「豊国社臨時祭」。秀吉の七回忌にあたるこの年、家康と秀頼が施主となり、8月14、15日の両日、京都で大々的に執行されました。家康の巧妙な筋書きに、手のひらで踊らされる豊臣方。家康の執念と恐ろしさに気づくのは、もう少し先のことです。

덧붙이면 이에야스는 요도를 안심시키기 위해 센히메의 출가 외에 한 방법을 더 쓴다. 그것은 다음해 케이쵸 9년(1604)에 행해진 '토요쿠니사 임시제'. 히데요시의 7주기를 맞이한 이 해, 이에야스와 히데요리가 시주(불사를 하는 당사자)가 되어 8월 14일, 15일 양일에 교토에서 대대적인 행해졌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계획에 조종당하는 토요토미 측. 이에야스의 집념과 무서움을 알아차리는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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