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 윌슨의 얼굴에서도 세월이 느껴진다. 세월이 남기는 건 주름만이 아니다. 고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디 알렌의 내공도 세월이 보태어 준 것일 수도 있고.

 

파리는 예술과 낭만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로서 세계 사람들에게 인식되나 보다. 내가 본 다큐에선 그저 사방팔방 개똥 천지이면서, 사람사는 지구 저 너머 유럽대륙의 한 도시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사는 서울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고 있을까? 영감이란 것을 줄 수 있기나 한 도시일까? 마냥 피곤하고 지루하고 번잡하기만 한 곳이지 않을까?

 

스캇 피츠제랄드, 아마도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문학과 예술엔 기본 이하의 지식 수준인지라 잘 모르겠지만 우디 알렌은 곳곳에 영화 속 위대한 인물들과 관련하여 장치들을 마련해 두었을 것 같다. 내겐 안보였지만, 그것들이 보이는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배는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If you stay here, it becomes your present then pretty soon you will start imaging another time was really your golden time. That's what the present is. It's a little unsatisfying because life is so a little unsatisfying.

 

길 펜더는 1920년대를 황금시대로 생각한다. 그러다 파리의 어느 골목에서 시작된 우연한 시간여행으로 황홀경을 느끼고 그 시절의 매혹적인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는 늘 다른 황금시대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래서 오히려 그의 파리를 향한 사랑과 느낌이 더없이 낭만적이고 멋져 보인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열정을 불태울 대상이 있으니까.

 

열차역 어느 지점을 통과하면 호그와트행 열차를 탈 수 있는 영국, 자정이 지난 후 도시 어느 골목에 가면 과거 어디로 데려다 줄 택시가 오는 파리. 내가 사는 도시에 감춰진 것은 무엇? 한 박자 천천히 움직이고 갈색 빛깔 사진 속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시절로 갈 수 있는 통로가 혹시 있을까? 안되나? 어두운 근현대사 속으로 잘못 들어갔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당하거나 삼청교육대에서 인생을 썩힐 수야 없지.

 

길이 시간을 넘어간 곳에서 매혹된 여인 아드리아나. 고혹적인 여인이지만 자신의 시대에서 늘 그리던 1890년대도 다시 현재가 되고 지루해질 것이라는 길에게 이별을 고한다. 삶이 권태로워 아름다운 여인인가.

 

 

마초적 남성미를 발산하는 헤밍웨이, 정말 사랑한다면 그 순간엔 죽음도 두렵지 않단다, 이런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그의 매력에 미쳐버리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을 듯.

살바도르 달리, 코뿔소 타령으로 그 사람의 세계의 차원이 남다름은 금새 알 수 있다. 달리, 달리를 외치는 모습에 키득거림이 절로 나기는 하지만 초현실주의 화가 모습이 정말 저러했을 수도 라며 수긍하게 된다.

 

 

고색찬란한 옛 시절의 유물, 화려한 도시 뒤에 숨쉬고 있는 낭만을 사랑하는 길은 예비장인에게 어딘가 모자란 녀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형의 설레임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였기에 아드리아나가 좋아했던 것 아닌가?

 

 

 

비오는 파리를 같이 걸어가는 두 사람, 마지막 장면이 근사하다. 시간여행도 황홀하지만 사랑하고 동경하는 곳으로 이사할 수 있다는 것도 멋지다. 그리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여인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하는 것이 제일 행복할 것 같다. 아가능불회애니의 이따런과 청요칭은 십사년을 같이하고도 나눌 이야기가 항상 산더미였다. 가브리엘과 길도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파리에 대한 어떤 로망도 없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비오는 날 파리를 걷고 싶어진다. 비오는 거리를 걷는 것은 좋지만 젖는 것은 별로이므로 멋스런 트렌치코트 스타일의 우비를 입고 말이다. 비오는 날을 만나면 엠피쓰리와 이어폰을 버리고 서울거리라도 한번 걸어봐야 겠다.

 

영화음악도 옛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데 적합한 재즈들이었다. 살아보지도 않았던, 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을 향한 향수. 

 


미드나잇 인 파리 (2012)

Midnight in Paris 
7.9
감독
우디 앨런
출연
오웬 윌슨, 마리옹 꼬띠아르, 레이첼 맥아담스, 애드리언 브로디, 카를라 브루니
정보
코미디, 판타지, 로맨스/멜로 | 미국, 스페인 | 94 분 | 2012-07-05
다운로드 글쓴이 평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