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름에 고른 일본 영상물들은 대체로 실망스럽다. 최근에 영화 한편, 애니 한편을 보았다. 영화는 벚꽃, 다시 한 번 카나코, 애니는 바람이 분다이다.

 

벚꽃, 다시 한 번 카나코는 히로스에 료코와 이나가키 고로가 출연진임을 확인하고 본 영화이다. 히로스에 료코의 작품 선택의 눈을 믿었다기 보다는 히로스에 료코나 이나가키 고로의 안정적으로 보이는 연기를 믿었다. 그리고 인간사의 어떤 것도, 자신의 견해도 믿음을 둘 만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히로스에 료코의 영화는 굿바이가 제일 좋았던 것 같고, 이나가키 고로는 그냥 무난하고 재미진 드라마에서 만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후타타비노 카나코, 뭔 소리야 하면서 봤는데 역시나 환생이다. 죽은 아이가 아는 사람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는 유아시절엔 환생하기 전의 부모를 알아본다는 것.

 

영화 속에서 환생까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 위에 덧붙여진 전생의 부모 인지설은 실사판 인물들의 진지한 연기로 보기엔 껄끄러웠다.

 

이나가키 고로가 만들어내는 인물은 단조롭고, 요새 흔히들 말하는 바와 같이 영혼없는 인물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히로스에 료코가 분하는 역할도 아이를 잃은 상처 속에 매몰된 사람 이상으론 보이지 않았다.

 

벚꽃, 다시 한 번 카나코는 영화 중간 중간에 괜찮아 보이는 섬세한 디테일이 있긴 했으나, 너무 많이 가버린 일본식 정서에 그저 하품만 나온 영화다.

 

환생, 죽은 자와 짧은 조우, 성불 등은 일본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소재인 것 같다. 대충 기억나는 것만 해도 타케우치 유코의 환생과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 가슴 가득히 사랑을, 컬러풀 등등

 

환생 등의 소재를 담은 영화들은 삶, 만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종결짓는 죽음에 대한 극복을 열망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사람으로서 극복할 수 없는 죽음으로 빚어지는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담은 것인가? 어찌되었든 벚꽃, 다시 한번 카나코는 애잔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였다.

 

 

바람이 분다 역시, 그동안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애니와 같지 않았다. 영상과 음악은 여타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인상적이지 않았다.

 

비행기 설계사를 꿈꾸는 호리코시 지로의 외곬 인생은 보였다. 애니 속 지로를 보며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을 떠올렸다. 꿈이라는 것은 미쳐야 꿈에 대해서 뭔가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의 호리코시 지로, 그가 만들어낸 비행기는 태평양 전쟁의 주역 제로센 비행기였다. 애니가 보여주는 꿈에 매진하는 지로는 사실 불편하다.  

 

애니 속 지로를 보며 원자폭탄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꿈에 매달리며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개인들이긴 하지만 그들의 꿈의 결과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한다면 바람이 분다는 반딧불의 묘만큼이나 불편한 애니일 뿐이다.

 

나호코와 지로의 첫 만남에서 나눈 발레리의 시 한구절,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風立ちぬ、いざ生きめやも 가 이 애니의 주제인 듯 하다. 애니 끝무렵에 나호코의 환영이 홀로 남은 지로에게 당신은 살아가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장면만이 바람이 분다가 줄 수 있는 불편하지 않는 보편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중간중간의 매듭도 썩 매끄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바람이 분다는. 이러저러한 면에서 바람이 분다의 엔딩곡으로 흐르는 비행기 구름ひこうき雲이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것 같다.

 

 

白い坂道が 空まで續いていた
ゆらゆらかげろうがあの子を包む

誰も氣づかずただひとり あの子は昇っていく
何もおそれないそして舞い上がる

空に憧れて空をかけてゆく
あの子の命はひこうき雲

高いあの窓であの子は死ぬ前も
空を見ていたの今はわからない

ほかの人にはわからない
あまりにも若すぎたとただ思うだけけれど しあわせ

空に憧れて空をかけてゆく

あの子の命はひこうき雲

空に憧れて空をかけてゆく
あの子の命はひこうき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