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비단 장막으로 추위가 스며들고 아직도 밤이 길게 남았는데

텅 빈 뜨락에 이슬이내려 병풍이 더욱 차가워라.

연꽃은 시들어도 밤새 향기가 퍼지는데

우물가 오동잎이 져서가을 그림자가 없네.

물시계 소리만 똑똑 하늬바라에 들려오고

발 바깥에 서리가 짙게 내려 밤벌레 소리 구슬프구나.

베틀에 감긴 무명을 가위로 잘라낸 뒤에

옥문과 님의 꿈 깨니 비단 장막이 쓸쓸하네.

님의 옷 지어내어 먼 길에 부치려니

등불이 쓸쓸하게 어두운 벽을 밝히네.

울음을 삼키며 편지 한 장을 써서

날이 밝으면 남쪽 길 가는 역인에게 부치려네.

옷과 편지 봉해 놓고 뜨락을 거니노라니

반짝이는 은하수에 새벽별이 밝구나.

찬 이불 속에서 뒤척ㅇ며 잠도 못 이루는데

지는 달만이 다정하게 병풍 속을 엿보네.

 

 

여름, 뜨거운 태양을 피해 방에 콕 박혀 난설헌 관련 책 두 권을 읽었다. 한 권은 평민사에서 펴낸 허난설헌 시집이고, 한 권은 예담의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였다.

 

허난설헌 시집은 정말 오랫동안 읽었다, 숨이 턱턱막히는 여름 열기 속에서 간신히 책장을 온전히 덮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부령을 그리며 라는 한시집을 읽으며 느꼈던 아쉬움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로 허난설헌 시집을 마주했다. 한시 원문에 있는 한자를 하나하나 찾으면서 고교시절 한문시간을 되새김질하며 일천한 지식으로 해석해 보겠노라며 용을 써봤더랬다. 무모함 그 자체였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당연히 허난설헌의 시집을 읽으며 그녀의 뛰어남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볼 수 없었다. 다만, 한자를 포기하고 각주에 목숨을 건 이후 허난설헌의 고금서에 대한 지식이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요새 말로 풀이된 시를 한 수 한 수 읽다보면 허난설헌이 느꼈던 참척의 슬픔이나 생각들이 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지긴 한다. 그리고 그간 보아오던 사극을 바탕으로 시 속의 정황을 상상해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없진 않다.

 

허난설헌이 어떻게 내 관심의 영역에 들어왔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난설헌이란 호가 멋지다는 생각을 막연히 생각해왔었고 '초희'라는 이름도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러면서 조금씩 허난설헌에 대한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

 

예전에 돌베개에서 나온 조선의 여인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이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읽었었다. 시대불문하고 비범한 자들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비범한 자들, 여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허난설헌이 그 비범한 조선의 여인 중 한 명이었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조선의 여인들이란 책 속에는 임윤지당, 송덕봉 등이 있었지만 그들 중 유독 허난설헌의 생은 서글펐다. 서글픔이란 단어만으론 모자를 것 같은 허난설헌의 생을 보며 만남의 복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때를 잘 타고나는 복. 덧붙여 여인에게 있어 복스런 시월드와 만남. 하지만 난설헌, 그녀의 때와 시월드는 불운 그 자체였다.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이 책은 평민사의 시집과 달리 술술 잘 읽혔다. 특히나 허난설헌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오라버니 허봉과 재회한 후 산에서 치열하게 시인으로서 고민하는 모습이 책 제목으로 공언된 나는 시인이다가 절규로 다가오게 했다.

소설 속 난설헌은 강인한 여인이었다. 소설 속 난설헌의 멘탈은 나의 이십대 시절의 정서와는 근본적으로 비교불가한 경지였다. 소설 속 난설헌을 보면서 삶에서 일정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삶에 포함된 모든 고통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을 배우고,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겠지. 슬퍼하고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용서하며 살아가게 될 터잊. 경란아, 그것이 삶이란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란다. 고통이 따르는 것, 아지만 경란아, 고통이 오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고통은 네게 순금의 영혼을 줄 테니까. 네가 순금의 영혼을 가질 수만 있다면, 너는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니까.

 

허봉, 허난설헌, 허균, 삼남매는 그들의 비범함을 시샘당하듯 순탄치 않은 삶을 살다 갔다. 허봉의 좌절이나 익히 알려진 허균의 능지처참이란 최후가 시리다.

 

간혹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을 비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가 여성으로 기록에 남은 비범한 여인들이라는데서 그런 비교를 하게 하는 것 같으나, 그들의 삶은 너무 대조적이다. 비교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선 난설헌의 아픈 사랑을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황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랑부터 시작해서 난설헌의 짧은 삶 속에 점철된 굵직굵직한 상실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

 

맑은 가을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연꽃 무성한 곳에

꽃배를 매어두었어요.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

한나절 혼자서 얼굴 붉혔어요

 

난설헌, 나는 시인이었다,는 재미도 있지만 너무나 낯설어진 우리말들이 꽤나 등장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 가슴애피, 당알지다, 더덜뭇하다, 반지빠르다, 노루잠, 나비잠....등등..잘 기억해 두려 했건만 벌써 아련해진 이 풍요한 단어들, 작가들에게 바란다, 우리말 어휘를 풍성히 사용해 주시길..

 

 

 

난설헌,나는 시인이다
윤지강 저
허난설헌 시집
허경진 역
난설헌
최문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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