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터 페터 피셔 지음
들녘 펴냄
주머니에 손 넣고 교보문고를 빙빙돌다 매대를 슬쩍 슬쩍 넘겨보는데 빨간 사각형을 통과하려는 고양이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이 녀석은 내 가방에 담겨 집으로 옮겨졌고 근 1년간 책꽂이에 자리하고 있었고 드디어 오늘 다 읽혔다.
알파입자와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고양이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상자 속에 들어있고, 이 상자는 독가스가 들어있는 통과 연결되어 있다. 독가스는 벨브에 가로막혀 상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독가스가 든 통 역시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벨브가 열리는지 볼 수 없다. 이 벨브는 방사능을 검출하는 기계 장치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기계 장치는 라듐 등이 붕괴하며 방출한 알파입자를 검출하여 벨브를 연다. 벨브가 열린다면 고양이는 독가스를 마셔 죽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 라듐은 단위 시간 당 50%의 확률로 알파붕괴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단위 시간이 흐른 후에 고양이는 50%의 확률로 살아 있거나 죽어 있을 것이다.
위키백과에 소개된 슈뢰딩거 고양이이다.
이 책은 누군가의 이름이 붙은 개념들을 소개하고 있다. 오컴의 면도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오일러의 수, 푸앵카레 추측, 아인슈타인의 유령, 케쿨레의 꿈, 로렌츠의 각인, 파블로프의 반사.....
책을 읽는 동안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배우고 봤던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숨어들어간 것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열역학 2법칙이 엔트로피였지, 오 맞아 켈빈 온도라는 것도 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플랑크 상수, RNA 전사 ...음하하하...깨끗하게 머릿 속에서 지워져 있었구나 ... 등등의 독백을 하면서 읽었다.
책 말미 쯤에 쇼펜하우어를 모르거나 인문학적인 상식이 없으면 무식하다고 하면서 과학자 볼츠만이나 파울리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과학문화와 인문문화의 단절, 이런 태도는 지식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통섭'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스노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우리에게 자연을 지배하는 지식을 제공하고, 정신과학은 타자와 관계하는 지식을 제공한다. 정신과학적 문화의 특징이 직관적 이해력과 개별적 체험의 영역에 있다면, 자연과학적 문화의 특징은 계량적 실험의 체계적 실시와 보편타당한 법칙의 수립에 있다.
2011년 대한민국엔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올해도 인문학 열기는 지속될 것이라고 여기저기서 말하고 있다. 스노의 말을 보면 그러한 인문학 열기를 꺼트리지 않으면서 자연과학의 열기도 일으켜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인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알쏭달쏭함에도 불구하고 귀를 쫑끗 세우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기억해 두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땐 뭔 소리는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당최 아리송한 인문학의 이야기보다 과학이 명쾌할 것이다. 칸트나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절반만 쓴다면 슈뢰딩거의 고양이 쯤은 아주 쉽게 읽힐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유령, 호킹의 복사, 보어의 말편자 ...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읽다보면 야사를 접할 때 느끼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1,2학년들에게 적절한 책일 수도 있겠다 싶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로 나가는 것이 비약인 듯 싶기도 하지만 이공계가 홀대받는 대한민국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공계생들이 의대에 몰리고, 사회에 나왔을 때 전자공학도 정도가 그나마 괜찮은 정도이며 기초과학은 홀대받는 대한민국 이공계.
대한민국, 전자제품 몇 개 만드는 것으로 자족하면서 살 때가 아니지 않나?! 과학 선진국들의 행보를 본다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기초가 튼튼해야 뭘 세우던 말던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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