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이런 드라마를 만든다면 시청률 바닥을 칠 것 같다. 애시당초 이런 류의 드라마를 기획하지도 않을 터지만.

 

나이 서른이 넘었으나 직장 생활을 해 본 적도 없고, 남자친구에겐 차였고, 친구는 없고 교류하는 사람은 여동생뿐이다. 혼자살기 위해서 부모님 집에서 나왔으나 부모님의 보조로 생활한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요리코의 상황이다. 요리코같은 사람이 일본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와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총 8화로 구성된 도보 7분은 요리코의 행동반경을 묘사하는 것 같다. 1화와 2화를 보면 요리코의 매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자신만의 의미를 찾고 싶은 것 같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다. 기실 자신만의 의미를 명확히 찾아낸 사람은 소위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2회를 넘어가면서 요리코에 대해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그 판단의 근거라는 것, 잘 생각해보면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 살면서 주입당한 가치관이 만들어낸 것일터이니, 판단은 의미가 없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겠는가, 드라마를 떠나서 모든 인간에 대해서 말이다.

 

요리코 집에 누군가 손편지를 보낸다. 더우기 우편함이 아니라 현관문에 있는 신문꽂이 같은 곳에 편지를 넣는다. 이웃집 사요코가 편지를 넣는 타나카를 목격하고 스토커로 의심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요리코는 이웃집 여인과 교류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들은 이웃사촌이 되어 맥주를 마시며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문제의 편지를 넣던 인물, 타나카도 같은 건물에 이사와 아래위층의 이웃이 된다.

 

요리코는 이웃들과 관계를 시작하면서 고립이라는 벽을 조금씩 허물어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거의 요리코의 방에서 진행된다. 요리코 방 이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같은 건물에 있는 도시락 가게이다. 도시락 가게에서 오가는 대화들은 참 시덥지 않다.

 

우리가 누군가와 나누는 이야기를 잘 생각해보면 대체로 시시콜콜하다. 시덥지 않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이어지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은 또 다른 이 사람과 저 사람과 이어지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려니 생각하면 시시하다며 어처구니없다는 타박을 할 수가 없다.

 

다만, 도시락 가게에서 오가는 대화를 보면서 우리는 모두 저마다 약간의 똘기를 갖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언젠가 서점에서 또라이 제로라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다. 사회생활하면서 '아니 뭐 저런 또라이가!!'라는 생각 또는 말을 했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또라이'라는 말 대신 좀더 고상하거나 험한 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또라이'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린 것이라는 생각을 드라마를 보면서 했다. 결론을 낸다면 또라이 제로사회는 불가능할 것 같다. 우리 모두 어느 누군가에겐 또라이가 될 터이니 말이다.

 

 

요리코가 화장실에 갇힌 일이 생겼다. 편지로 이웃이 된 타나카는 그 상황을 웃지 않고 여러모로 도와준다. 요리코도 내성적이지만 이웃집 타나카도 내성적이다. 내성적인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에게 이해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세상은 내성적인 사람보다 외향적인 사람에게 좀더 친절한 것 같다.

 

도보 7분은 요리코의 성장이야기다. 어른도 성장이 필요하다. 청년과 어린아이들만 성장하진 않는다. 요리코는 소수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지만 내성적인 그녀에겐 충분한 만남이었다. 그 소통으로 요리코는 전남친과 관계도 정리할 수 있었고 만화를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타나카와 새로운 러브스토리도 이어질 것이다. 드라마에선 보이지 않겠지만.

 

사람때문에 화나고 상처받기도 하지만 사람은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달받았다, 내 마음대로.